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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은 어느 은퇴 목사님께서 글의 주제를 내게 미리 메일로 주시면서,
한 번 써주기를 원한다는 특별한 요청에 의해서 쓰게 된 것입니다.
아마도 필자가 순전한 하나님의 은혜로 의학적으로 죽음의 경계선을 넘고 살아난
특별한 영적인 체험이 있어서 이런 부탁을 하신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믿음이 맹신이 되지 않기를 원하옵고, 통전적인 세상성 이해와 그 가운데서의 우리 신앙이
말씀의 터전 위에서 견고히 설 수 있기를 원합니다.
자기 자신을 감추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때 우리는 더 큰 아픔을 느끼고 신앙의 불같은 시험가운데 위기를
느낍니다. 이 글을 통해서 다시 한 번 믿음이 세워지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1. 감추시는 하나님과 나타내시는 하나님:
인류가 제1, 2차 세계 대전을 경험하면서 사상조류(思想潮流)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뉘었다. 하이데거, 까뮈, 사르트르로 대변되는 무신론적 실존철학과 키에르케고르, 야스퍼스, 마르셀이 주도했던 유신론적 실존철학이 그것이다.
전쟁은 그야말로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범죄요 끔찍한 참상이다. 한 시대가 싫든 좋든 집단적인 파멸과 죽음을 공동 운명체로 겪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일개인의 도덕이나 윤리 혹은 종교까지도 큰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함께 엮여져서 말로 다 할 수없는 고통과 비극을 경험해야만 한다. 전쟁은 그야말로 철저히 '숨어계신 하나님, 자신을 감추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고통의 시대다. 전쟁 뿐 만이 아니라 우리 각 개인이 체험하는 삶 또한 때로는 그런 하나님을 대하게 되고 갈등하게 된다.
이 세상은 자신을 감추시는 하나님과 자신을 강렬하게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공존하는 비밀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갑자기 어린아이로부터 연약한 여자와 노인에 이르기까지 무차별로 아우슈비츠로 끌려간 600만 유대인들은 영문도 모른 채 나찌 독일군에 의해 독가스를 마시고 죽어가야만 했다. 밀페 된 공간 속에서 하늘을 향하여 아무리 애끓는 눈물로 호소해도 하늘은 여전히 침묵 속에 꿈쩍도 않고, 죽을 운명은 전혀 바뀌지 않고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던 것이다.
사람들은 절규했다. “하나님은 없다! 아니 설령 있다 해도 그 하나님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 하나님이 나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사실 이와 같은 모습은 우리 가운데 지금 여기서 늘 일어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세월호가 침몰하고, 피어보지도 못한 채 희생된 수많은 학생들과 비통하게 울부짖는 유가족들을 보면서 이 사실을 재확인하며, 신앙의 불 같은시험을 받는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때, 그 믿음의 본질은 어떤 것을 뜻하는가? 절대 절명의 순간에 삷과 죽음이 백지장 한 장 차이로 갈리는데 그 결과는 하늘과 땅보다 더 큰 차이를 받아들여야 하는데, 이를 어떻게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단 말인가.
이를 마땅히 알 수 없어 그것이 더 큰 아픔과 고통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닐까 한다.
이런 안타까운 모습을 보면서, 한편의 사람들은 한없는 무력감에 좌절하고 동시에 분노한다.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이렇게까지 감당키 어려운 시련을 맛봐야 하느냐고 항변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에게 책임을 묻는 것을 넘어서서 하나님에게까지 냉소적인 비웃음으로 돌을 던진다.
"하나님! 당신이 자비로운 사랑의 하나님 이라구요?
당신이 생명을 품으시고 구원하는 하나님 이라구요?
당신이 생사화복(生死禍福)을 주관하는 전능하신 하나님 이라구요?
우리의 이 참담한 모습을 보십시오. 여기에 무슨 자비가 있고 정의가 있고 사랑과 구원이 있습니까? 당신이 정녕 존재하신다면 제발 좀 끼어들지 마십시오. 차라리 우리를 내버려 두십시오. 우리들의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할 터이니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거나 훼방하지만 말아주십시오...." 라고 울부짖으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나아가서 대적하기까지 한다.
이들은 대개가 회의론자(懷疑論者) 혹은 무신론적 실존주의에 머물면서 휴머니즘에 바탕을 둔 자유의지와 책임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얼마 못가서 뼈아픈 좌절과 실망을 맛보고 정신적 방황을 겪게 된다.
이미 죄 아래 있는 이 세상은 자력(自力)으로는 죽을 운명을 벗어날 가능성이 털끝만큼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 품을 떠나 실존(實存)하는 인간의 딜레마다.
인류 역사를 전쟁의 피의 역사로 볼 정도로 세상에는 죄악이 넘쳐난다.
세월호의 참사는 언젠가는 터지기로 예약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 점차확인되고 있다. 사업주는 끝없는 이윤추구로 배의 안전성은 그 언제나 뒷전이었고, 선박직 종사자들은 자기 살기에만 급급하여 무책임하게 탈출했던 것이다. 이런 죄의 대가는 엄청난 비극을 몰고 온 것이다.
그런데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이렇게 탄식으로 고백하며 무릎을 꿇는다.
"만유(萬有)의 주재(主宰)가 되시는 의로우신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
해 아래 있는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며 죽을 운명에 있음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목도합니다. 우리 모두는 비존재(非存在)의 존재(存在)에 지나지 않음을 고백합니다. 지금 살아있으나 죽은 자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지존자(至尊者)의 뜻을 멸시하고 거역한 결과가 이렇듯 허무와 파멸과 죽음의 고통을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신 용서와 구원만이 죽음도 이기는 부활의 소망인 것을 다시 한 번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지금 이렇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림으로 세상 그 무엇으로도 빈자리를 채울 수 없고, 그 어떤 것으로도 위로 받을 길이 없지만, 세상성(世上性)의 운명이 본시 그런 것을 어찌하오리까?
그래서 하나님 한 분 만을 바라보고 위로받기 원합니다.
이 세상 것은 어차피 낡아지고 썩어질 것이오니 아버지 품안에 받아주시고, 아버지 뜻이 다 이루시는 그 날에 전혀 새로운 하늘의 생명으로 다시 부활시켜 주시고, 오직 그 크신 하나님 은혜로 말미암아 눈물 씻겨 주시고 피 맺힌 한을 풀어주시고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지고(至高)한 복과 안식을 주시옵소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모순과 부조리가 크면 클수록, 힘들고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우리는 눈물을 삼키며 온전한 구원의 그 날을 더욱 더 기다리고 사모하며 오늘 주어진 하루를 진실하게 살기 원하오니 능히 헤쳐 나갈 수 있도록 새 힘을 주시옵소서.
환난이나 기근이나 사망이나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놓을 수 없음을 믿사오니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으로 인도하여 주소서.
우리에게 위로의 성령께서 함께 하시고 우리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사 살려주십시오....." 라고 기도한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주시고 구원해주시며 우리 삶을 통해서 아버지의 뜻과 섭리를 다 이루어 주신다.
2. 울지 말라.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삶과 죽음, 그것은 태초에 하나님이 정하신 하나님의 법이요 뜻이다.
우리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죽음으로서 결정짓게 된다.
한 번 태어난 인생은 누구나 예외 없이 반드시 죽는다.
그 수많은 사람이 태어났으니 매일 매일 수도 없이 죽는 사람들을 우리 주변에서 늘 목격하며 살아간다. 죽음이 삶의 일부처럼 친숙해질 때가 된 것 같건만 절대로 그렇치가 않다. 여전히 죽음은 낯설고 피하고 싶고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다. 그것은 왜 그럴까? 죽는 순간에 아플까봐 그 고통을 어떻게 넘길까 걱정되어서 일까? 그런 면도 있겠지만 아닐 것이다.
죽음이 참으로 두려운 것은 죽은 이후에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혹시 지금까지 살아왔던 생에 대한 책임과 이에 대한 심판 같은 것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 그런 것 때문 아닐까 한다.
사후세계(死後世界)에 대한 명백한 이해를 갖을 수만 있다면 우리의 삶은 보다 나아질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신앙 안에서만 찾아질 수 있다.
생과 사의 문제는 영적인 것인데, 영이신 하나님만이 이 문제를 주관하고 다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본 글은 어느 은퇴 목사님께서 글의 주제를 내게 미리 메일로 주시면서, 한 번 써주기를 원한다는 특별한 요청에 의해서 쓰게 된 것이다.
아마도 필자가 순전한 하나님의 은혜로 의학적으로 죽음의 경계선을 넘고 살아난 특별한 영적인 체험이 있어서 이런 부탁을 하신 것인지도 모른다.
성경에 병에 걸린 12살 된 어린 소녀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그것이 세상이다. 애석한 일이다. 살자고 태어났는데 너무도 일찍 스러지는 아침 이슬처럼 져야 한다니 가슴이 미어진다. 모든 사람들이 울며 통곡했다.
이 사건은 공관복음서 모두에 기록될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던져주고 있다.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 하거늘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그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이르시되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시니 그 부모가 놀라는지라’(눅8:49-55).
아이는 분명 죽었다. 호흡이 끊기면 즉시 부패가 시작되고 흙으로 돌아간다. 모든 죽음이 다 마찬가지다. 죽는 순간 육체에서 하나님의 영이 빠져나가고 몸은 즉시 티끌로 변하기 시작한다. 본시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은 죽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있을 때 생령(生靈) 곧 살아있는 영적 존재이지 죽고 나면 다 흙이요 먼지인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소녀의 죽음을 잔다고 말씀 한다.
‘하나님의 때’가 될 때까지 영면(永眠)에 들어갔다가 하나님이 오시는 날 ‘아들의 음성’을 듣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에 들어가게 될 영혼으로 보신 것이다(요5:28).
그런데 이 특별한 순간에 자신이 메시아(구세주)이심을 보이실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병을 고쳐 다시 살려내신 것이다.
“울지마라. 이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아이야 일어나라!”말씀 하시니 죽은 소녀의 떠났던 영이 홀연히 돌아와서 살아났고, 일어나 음식도 먹으니 모두가 놀랐다.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죽은 자를 살릴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을 살려낸 이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아닌가? 하고 놀랐던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의 권세를 다스릴 수 있는 능력자다. 우리가 예수께로 나아가는 이유가 여기 있다.
죽음은 이 세상에서는 끝이지만 동시에 천사들의 하늘이 펼쳐지는 영계(靈溪)에서는 시작점이기도 하다. 이 세상에는 완전한 것이 없다. 모든 것이 다 뭔가가 결핍되어 있다. 하나님만이 완전하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천국만이 완벽(perfect)한 나라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통치만이 영원한 의로움이시고 영원한 아름다움이시다.
하나님이 우리의 죽음을 받으시고 축복해주시면 이 세상은 두 번 다시 되돌아보거나 미련을 갖지 않게 된다. 이 세상은 죄와 저주와 눈물과 고통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 죽음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괴로운 육신의 장막을 속히 벗고 하나님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고자 죽기를 소원하는 동경(憧憬)같은 것이다.
바울이 그랬고 구차히 목숨을 구걸하기를 거부했던 순교자들이 또한 그랬다.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11:35-40).
사람은 누구나 살고자 하는 본능적인 의지를 가지고 태어난다.
아무리 천국이 좋다할지라도 지금 여기서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죽기를 무서워 마귀의 종살이 하면서까지 목숨에 집착한다면 이는 부활 생명도 죽음으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전15:12-20).
하나님을 모르는 사형수들은 대개 사형 집행장으로 끌려 나올 때 그 비참함이 극에 달한다고 한다. 겁에 질려 다리가 풀려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질질 끌려 나오면서 오줌을 싸고, 어떤 이는 온갖 상스러운 저주를 퍼붓고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최후를 마친다고 한다.
이에 반해 하나님을 만나 구원의 은혜 가운데 사형을 받는 사람은 할렐루야 감사 찬양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이 몹쓸 사람이 마땅한 죄 값으로 사형을 받게 되어 다만 얼마만큼이라도 대가를 치룰 수 있게 되어 감사하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나로 인해 피해를 입은 모든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고 하나님께 긍휼하신 은혜로 받아 달라고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드리며 평안한 얼굴로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인다고 한다.
‘너는 내 것이라’는 책을 쓴 원종수 권사님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분이시다. 그는 자신이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재학 시절에 폐결핵에 걸려서 서울대 병원에서 죽음을 선고받았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기적적으로 치유 받고 새 삶을 얻은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그러나 반면에 그의 매형은 아주 젊은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나야만 했다. 그렇게도 하나님만을 사랑했던 훌륭한 믿음의 사람, 잘 생긴 외모에 건강하고 유능했던 사회인, 무엇 하나 나무랄 데 없는 매형이었는데, 한창 일할 나이에 어느 날 갑자기 왜 세상을 등져야만 하는지 아무도 설명해줄 수 없었고,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것을 매형의 죽음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절감했다고 한다. 그의 누님은 목사님이었는데, 누님의 남편이 애석하게도 그렇게 죽은 것이다. 자기 자신은 죽을 병에서 살아났고, 매형은 너무도 아까운 나이에 안타깝게 죽고 말았는데, 이 상반된 하나님 체험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의 매형은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너무도 의연하고 담대한 태도는 주변사람 모두를 놀라게 했다고 한다.
죽음을 이기는 담대한 용기는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는 “할렐루야 ! 죽음이여 어서 오라. 기꺼이 맞아 주리라!” 하며 감사의 찬송으로 임종을 맞이했는데, 슬픔에 잠긴 그의 가족 모두는 도리어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 암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위로받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세상에 남겨진 가족들을 위로하며 매형은 하나님 품으로 안긴 것이다.
죽음에서 살아난 자기도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지만, 암으로 죽는 매형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였음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를 통해서 사람의 죽고 사는 것은 사람 손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고, 하나님 품안에서의 죽음이란 더 이상 절망이 아니라는 것도 절감했다고 한다. 자기는 매형의 죽음을 통해서 ‘진짜 그리스도인’의 참 모습을 확인했는데, 매형이 주고 간 교훈은 일평생 자기 생애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죽음을 사모하는 사도 바울의 고백은 자기 매형의 고백과 완전히 일치했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거하는 땅에 있는 천막집이 무너지면,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입니다. 우리는 이 천막집에 살면서 하늘에 있는 우리의 집을 덧입게 될 것을 고대하면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덧입게 되면 벌거벗은 몸으로 나타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천막집에서 사는 동안, 무거운 짐에 눌려 신음하고 있습니다.
죽을 것이 생명에 의해 삼킴 당하게 하기 위해, 우리는 이 천막집을 벗어버리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위에 하늘의 집을 덧입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마련하시고 우리에게 보증으로 성령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마음이 든든합니다. 우리가 몸을 입고 사는 동안에는 주님으로부터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사실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지, 보는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마음이 든든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몸을 떠나 주님과 함께 살기를 더 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몸을 입고 있든지 몸을 벗어 버리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각 사람은 몸을 입고 사는 동안, 행한 선한 일이나 악한 일이나 자기가 행한 행위대로 거기에 알맞는 보응을 받게 될 것입니다’(고후5:1-10).
죽음! 그것은 더 이상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죽음 후에 더 이상 형벌이 아니라 영광의 천국이 예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나는 죽기 위해서 왔다. 이제 나의 때가 되었다.
나는 죽으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한다” 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죽음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셨다(마16:21,마17:22,마26:18, 45, 요16:28).
예수님은 자신의 삶과 죽음을 다음의 한 말씀에 담으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우리도 예수님처럼 소극적인 죽음을 넘어서는 적극적인 죽음을 죽을 수 있기를 소원해야 하겠다. 죽음에 대한 분명한 신앙적 이해는 우리로 하여금 썩어 없어질 육(肉)을 위해 사는 저급한 수준의 삶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지고한 영적인 복된 삶으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 아담의 아들 셋은 아들을 낳고
‘너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뜻의
‘에노스’라 이름 지었다.
순간마다 이 뜻을 새기며 산다면
얼마나 가치 있는 삶을 살겠는가!(창5:3-7).
* 밥은 40일을 먹지 않아도 살 수 있지만
공기는 4분만 마시지 않아도 죽는다.
하나님의 숨결이 우리로 하여금
살아있는 생령이 되게 하셨다(창2:7 신8:3).
*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오
영생이시다.
영생의 약속이 고마우면
그 기쁨 전하자(딤전6:12 요일5:11).
* 영생의 약속이 고마우면 그 기쁨 전하자.
믿음과 선한 행실로 이웃에 본을 보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 돌리자(마18:8 딛1:2).
*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나니.(롬5:3-4)
* 부활의 주님 다시 오시면
지혜로 다스리시며 공평과 정의를 실현하신다.
새 하늘 새 땅이다. (고전15:51. 사9:7.암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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