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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한국 기독교회 목사님과 성도님! 안녕하십니까. 봄기운이 기지개를 켜는 3월입니다. 오늘 새벽에 기도하다가 문득 성령님의 감동하심이 있어 즉시 이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사회로부터 신뢰를 잃어버려 지탄의 대상이 되고, 젊은이들은 교회를 등지고, 성도님들도 점차 동요하고 떠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심히 안타깝습니다.
교회는 만민이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이라는 본연의 순수성을 잃고 너무 세속적이고 비 본래적인 일들에는 관심이 많고 참으로 해야 할 천국복음 전파의 사명에는 소극적이고 무관심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러한 위기의 시대에 영성회복을 위하여 ‘말숨’글을 쓰고 있는 저는 지난 2014년 12월에 말숨 산문집 제 8권 ‘사명이 있는 자는 죽지 않는다(부제: 병든 내 몸을 만져주신 신유의 손길)’를 쿰란출판사에서 기획출판으로 출간했습니다.
어찌하든지 영적으로 혼탁한 오늘의 시대에 하나님을 나타내는 살아있는‘말숨’글을 교회와 사회에 보급하기를 원해서 입니다. ‘말숨’이라는 신조어는 사람이 전하는 말 속에 하나님의 영, 곧 하나님의 숨결과 하나님의 호흡이 흐르고 있다는 뜻 입니다.
이 거룩한 일을 위하여 천국복음 전파에 마음이 열려있는 교회 목회자님과 성도님들을 찾고 있습니다. 특별히 금번에 '말숨' 글 4편을 첨가하여 수정증보판으로 출판하고자 합니다.
1. 영(靈)의 흔적을 남긴 김현봉 목사
2. 사명의식 하나로 우뚝 선 신앙의 거목(巨木) 박남일 목사
3. 하나님 만남의 복, 축복의 문이 열리는 복
4. 이름에 담긴 신앙적 성찰
이라는 제목의 '말숨' 글이 그것입니다.
이 일에는 한국 기독교를 향한 몇 가지 중요한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천국복음 전파를 위한 사명의식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한국 기독교회와 이웃 사회에 널리 알릴 수 있다는 것
둘째, 도시교회와 농촌교회의 아름다운 소통이 어떤 것인가를 실제적으로 보여준다는 것
셋째, 교회가 열린 마인드로 교파도, 개교회주의도 초월하여 함께 연합하여 오직 천국복음 전파라는 공동의 목적으로 일하고 섬긴다는 것이 어떤 긍정적인 놀라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보여줌으로서 한국 기독교회에 아름다운 선례를 남긴다는 것.
그 외에도 뜻을 함께 하는 모든 분들이 천국복음 전파를 위하여 매년 ‘사명이 있는 자는 죽지 않는다’ 라는 책을 한국 기독교회와 이웃 사회 기관 그리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웃 영혼들에게 사랑의 선물로 보급 헌신함으로서 교회 성도가 된 자긍심(自矜心)과 자존감(自尊感)을 높여주고 회복시켜주는 놀라운 기회가 될 것입니다.
이 일을 한국 기독교회 목회자님과 성도님들께서 함께 해 주시기를 해주시기를 원합니다. 작은 물방울들이 모여 커다란 강을 이루듯이 거룩한 뜻을 주시는 모든 분들의 일 만원 사랑의 헌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귀하고 값진 하나님의 크신 일을 이루어낼 것입니다. 이것이 밑바닥에서부터 끊임없이 개혁해 가는 한국 기독교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기를 소원 합니다.
참고로 올려드리는 아래의 글을 주도면밀하게 살펴주시고 천국복음 전파에 거룩한 뜻과 거룩한 열심을 주시기를 소원하며 기도합니다. 아래 1편의 글은 박정도 은퇴목사님께서 얼마 전 제게 보내오신 글이고 4편의 글은 수정증보 될 '말숨'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오늘도 행복한 좋은 하루 되십시오. 말씀의 빛 교회 염 소망 목사 올림.
(농협 301037-51-098385 말씀의 빛 교회. 010-9059-4037 책 받으실 연락처를 남겨주십시오)
(1) 박정도 목사님의 메일과 답신:
염동권 목사님께! 보내주신 귀하신 '말숨' 글 감명 깊었습니다. '말숨' 글과 함께 존재의
가치를 거기에 두시고 매진하시는 목사님께 성령님의 위로와 역사하심을 기원 드립니다.
아무리 값진 '말숨' 글 이라도 읽어주는 사람들이 없다면 무슨 소용 있으리요!
그러나 일단 읽기만 한다면 그 속에서 오묘하신 섭리를 이룩하심을 체험하게 하는 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영의 세계를 탐지하듯 기기오묘하게 술회해 주시는 글을 모든 성도님들이 읽어 주시기를 기원 드리오며 목사님의 글을 읽을 때 마다 어느 누구가 있어 이 글에 대한 인정으로 그 값을 치러주실까를 항상 생각해 드립니다. 어쩌면 글을 쓰는 사람이 제일로 불쌍한듯 하여 저라도 그 값에 대한 수고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나 내 것 다 턴다 해도 별것이 아니니 어쩌리요? 어느 갑부가 있어 그의 유산을 목사님 말숨 문서선교 사역을 위하여 남기고 가 줄 수만 있다면.... 하는 엉뚱한 잠꼬대 같은 생각도 해 봅니다만 도대체 목사님은 글을 쓰시고 엄청난 댓가의 책만 발행해 대시니 그 많은 빚은 하나님께서 갚아 주시리라는 용기로 하나님과 싸우시는가요? 목사님! 저 역시 목사님과는 다른 방향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만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꿈만 같은 기적이었음을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기에 날마다 새벽이면 예배당에 나아가 엎드려 간구할 뿐입니다. 저라도 목사님께 조그만 도움이라도 되어야 하는데 말로만 소리한들 무슨 소용이리요? 대신 저의 간구로 위하여 기도해 드릴뿐이나 목사님의 글을 읽은 한 분 숨은 독지가가 있어 어느 날 갑자기 목사님 사역이 크게 흥왕 되셨다 라는 뉴스를 들었으면 하는 꿈같은 기대를 갖아도 되겠습니까?
목사님은 사명이 있어 이 길을 걷는다 하거니와 뒤쪽에서 소리 없는 울음소리가 있을듯하다는 감각적 소리가 저에게는 들리는 듯합니다. 무슨 소리일지는 목사님이 더 잘 아시겠지요?
구도자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며 고난과 고뇌며 환난과 죽음과도 같은 인생의 가시밭길일 것입니다. 목사님은 구도자의 길에서 온갖 곤고와 환난과 질시와 멸시를 동시에 터득하며 살아가실 줄 믿습니다. 실속 있는 도움은 되지 못하며 현실에서 당하실 목사님의 입장을 이해하여 드린다는 동역자가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위로를 받는다면 더없는 뜻이라 여기겠습니다. 근래에 있었던 저와 관련된 여러 가지 사연들이 많으나 다음 기회에 전해 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주님의 평강을 빕니다. 凡平. 상 (박정도 목사). 2015. 3. 4. 밤.
(저의 답신): 사랑하고 존경하는 박정도 목사님께. 목사님 일전에 백내장 눈 수술하셨는데 경과는 어떠하신지요. 찾아 뵙지도 못하고 죄송스럽습니다. 목사님의 글을 받고 적지 않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사실 수많은 분들에게 '말숨' 글을 보내오나 자기 느낌이나 감정을 나타내는 독자는 매우 드물고 어쩌다 짧막하게 글 잘 읽었으며 은혜 받았다는 정도 입니다.
이처럼 오늘의 우리 시대는 무엇이건 의심스런 눈초리로 경계부터 하고 무관심과 침묵이 유행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람 산다는 것이 너무 지나치리만큼 메말라 있고 의심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천국 사귐이 그리운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일전에 '말숨' 문서선교 사역을 위해 특별한 글을 보내오셨고 제가 목사님의 이름으로 모든 분들에게 글을 올렸지만 이에 대한 그 어떤 대답이 거의 없는 것을 볼 때 저는 나 자신을 의심하기까지 했습니다. 제가 쓰는 '말숨' 글이 독자들에게 공감대를 얻지 못해서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 의심은 곧 사라졌습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목사님처럼 그런 공감대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침묵하고 자기 속내를 좀처럼 해서는 드러내지 않습니다. 이것이 현대 사회의 특징입니다. 그런데도 목사님은 정말 다르십니다. 목사님의 깊은 관심과 사랑에 눈물겹게 감사하고 동지애를 느낍니다. 저는 목사님 같으신 분 한 분만 계셔도 보람과 가치를 느끼오며 절대로 낙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만 알아주셔도 족합니다. ‘말숨’ 글은 제가 하나님을 직접 체험하고 하나님을 나타내는 글이기 때문에 이 목숨 다 할 때까지 '말숨' 글을 써서 이웃 영혼들에게 전파할 것입니다. 목사님의 사랑의 기도가 하늘에 상달되어짐을 믿습니다. 목사님의 사랑은 저를 지탱시켜 주시며 저에게 말할 수 없는 위로와 힘을 얻게 해주십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오늘 의정부지방법원에서 염 소망으로 개명 허락을 최종적으로 통고받고 면사무소에 개명 법 절차를 완료했습니다. 이름 하나 바꾸는 것도 무려 3개월이 더 걸리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언제 청주에 가면 꼭 목사님을 찾아뵙고 함께 밥이라도 먹고 싶습니다.
그때까지 은안 하시옵고 행복한 나날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밤도 편히 쉬십시오.
감사합니다. 말씀의 빛 교회 염 소망 목사 올림.
수정증보될 '말숨' 글 (1): 영(靈)의 흔적을 남긴 김현봉 목사
세월호가 침몰하는 순간 생각 있는 사람이라면 “대한민국도 함께 침몰했다!”고들 합니다.
21세기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섰다는 우리나라가 수 백 명의 사람들, 그것도 이 땅에 태어나 아직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한 가녀린 학생들이 배에 갇힌 채 살려달라고 애타게 절규했지만 우리는 그저 지켜만 보면서 발만 동동 구를 뿐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어른 된 것이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다고 합니다.
나 또한 비통한 심정으로 이런 고백들에 공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순식간에 그 아까운 수많은 인명을 단순히 잃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우리 사회의 병든 자화상(自畵像)이 총체적으로 들어있고, 더욱 어처구니없는 것은 우리 기독교계의 차마 얼굴을 들 수 없는 부끄러움이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 중심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구원파 교주 유병언이 있습니다. 세속적인 탐욕의 종이 되어 돈이면 다 된다는 식으로 정치, 경제, 사회 까지 주물러 초법적으로 배를 제멋대로 뜯어고치고, 선원들을 착취하고.... 결국 그 결과가 이런 참담한 아픔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개인의 사리사욕이나 채우는 이런 행태는 온갖 저주와 고통을 불러들인 것 아니겠습니까.
도대체 하나님 이름을 부르고 구원을 말 한다는 사람이 은닉된 수십억 돈다발은 무엇이며, 숨겨진 권총 5자루는 또 무엇입니까? 이런 것들은 무엇을 하자고 준비된 것들입니까?
하늘의 사랑과 은혜 그리고 구원과는 너무도 섬뜩할 정도로 다르지 않습니까?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의 타락과 다가오는 멸망의 심판을 내다보고 애통하며 눈물로 지내야 했습니다. 그에게는 진정한 애국심과 동족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심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그렇게 되면 살륙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곡읍 하리로다’(렘9:1).
그러던 어느 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너는 내가 누구에게 보내든지 갈 것이며, 내가 무엇을 말하던지 가감하지 말고 그대로 전하라’(렘1:7)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 순간부터 예언자로서 시대정신을 대변하고 표현하는 상징적(象徵的)인 몸짓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세인들에게 때로는 미친 사람처럼 보여 멸시와 수모를 당해야 했고, 자신의 행복 추구권이 박탈당하는 아픔과 배신자요 반역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옥에 갇히는 고통도 감내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너는 아내를 취하지 말며 자녀를 두지 말라. 너는 잔치 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앉아 먹거나 마시지 말라. 너는 상가 집에 들어가지 말라. 가서 통곡하지 말며 그들을 위하여 애곡하지 말라”는 특별하고 기이한 말씀도 받았습니다(렘16:1-11).
이 모든 기이한 행동들은 시대를 상징하는 몸짓이었습니다.
오늘의 우리 시대 특히 우리 한국 기독교계에도 이런 상징적인 몸짓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한없이 그리웠는데 나는 뜻밖에도 하나님 은혜로 지난 한 주간에 박정도 은퇴목사님의 권유하심으로 ‘신촌 예배당’에서 개최하는 사경회에 참석했다가 그런 상징적인 몸짓으로 살아가고자 애쓰시는 귀하신 강성률 담임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강 목사님을 가르치신 스승은 고 안병모 목사님이셨고, 안 목사님을 가르친 스승은 고 김현봉 목사님이십니다. 스승과 제자는 하나이기 때문에 스승을 보면 제자를 알 수 있고, 제자를 보면 스승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한다고 할 때 궁극의 목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닮아 하나님 아버지처럼 온전해지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나타내신 분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시고, 오늘 우리 삶에 하나님을 나타내시고 진리로 가르치시는 분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신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이시고, 성령님께 배우고 가르침 받은 사람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나타내는 복된 삶을 살게 됩니다. 말하자면 스승과 제자는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물질과 향락주의가 순수해야할 신앙을 변질시키고 오염시키는 이때에 평생 예수님의 청빈과 순결로 목회하신 김현봉 목사님의 고결한 신앙과 아름다운 삶을 조금이라도 배울 수 있다면 오늘의 우리 교회와 사회는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고 크게 변화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아 여기 소개해 올립니다. (한국기독교 120년 숨은 영성가를 찾아: 조연현 종교전문기자 ‘중목사’ 김현봉 참조)
우리나라 기독교 최초 선교사가 들어오던 1884년 경기도 여주군 가내면 건장리에서 김현봉은 태어났다. 아주 어릴 때 서울 서대문으로 이사하여 살게 되었는데 김 목사가 기독교인이 된 것은 22살 때였다. 그는 양정의숙 법과를 졸업한 뒤 교사 생활을 하면서 일제하 조선의 학생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다가 1910년 8월에 한일합방이 되자 조국을 위해 무엇인가 하고 싶은 생각으로 많은 날들을 고민하던 애국청년 김현봉은 1912년 월남 이상재의 소개장을 받아 가지고 중국 서간도 땅으로 건너갔다. 교포 2세를 위해 한국학교를 세워 한국 역사를 가르치고 다시 러시아 영 삼위로 옮겨 학교를 세우고 한국말과 한국역사를 가르쳤다. 중국으로 떠나 간도와 러시아 등에서 11년간 망명생활을 했는데 1923년 귀국하자마자 체포돼 투옥되었다.
그런데 그는 옥중 생활 중 뜨거운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고,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구체적인 구상을 하게 되었다. 사회개혁 이전의 문제 즉 하나님을 만나 구원을 경험하는 영적인 변화 없이는 인간에게는 궁극의 해결점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석방된 뒤 그는 평양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44살 때 16살 연하의 세브란스 간호사 박천선을 만났다. 얼굴이 얽었던 그의 아내는 병으로 이미 자궁을 적출해 아이를 가질 수도 없었으나 그는 의도적으로 그런 아내를 택해 결혼했다.
1925년 일제는 남산에 조선 신궁을 건설한 것을 시발로 해서, 1930년 들어서서부터 신사참배를 강요하게 되었다. 이들의 압박에 못 이겨 1938년 제27차 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게 되자, 큰 충격을 받고 김현봉 목사는 ‘자신과 교회를 어떻게 해야 바르게 살 수 있을까?’라는 제목으로 기도하던 중 십자가의 신학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스스로 낮아지고 스스로 고난을 짊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몸에는 철저하게 누더기를 걸치고, 궂은 음식을 먹고, 머리를 밀어버리고, 고무신을 신고 가장 낮은 자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생활 하였다. 교회에는 간판, 종, 종탑, 십자가, 의자, 성가대, 악기, 장로가 없었다. 목사 자신이 검소한 옷을 입고 다니기에 교인들 역시 사치한 옷을 입는 사람이 없었다.
그가 아현교회를 개척한 48살 때인 1932년이었다.
김현봉 목사는 한 때 공덕교회에서 기성교회 목회를 했다. 공덕교회에 홍 장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아들은 집사 일을 보고 있었는데 아들이 성수주일을 하지 않는 등 제멋대로 신앙생활 하는 것을 보고 여러 번 권면하였으나 듣지 않으므로 장로와 다투기도 뭐하고 하여 자신이 사임하고 새로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는데 그 교회가 저 유명한 아현 교회다.
마포구 아현동 굴레방 다리 근처 공동묘지 터에 빈민촌이 세워졌는데 그곳에서부터 7명 교인과 함께 교회를 개척하였다. 닭장을 개조하여 집을 만들어 예배를 드렸으며 계속 가난한 자들과 함께 검소하게 살았다. 서울 마포구 아현2동 354-21 아현교회는 1960년대 초까지 만도 영락교회와 함께 서울에서 가장 신자가 많았다. 하지만 아현 교회는 멋진 예배당도 교육관도 목사관도 없었다. 날로 늘어나는 신자들이 예배당에 들어오지 못하면 예배당 밖으로 지붕만 얹고 의자를 놓아 예배를 보게 했다. 그렇게 늘리고 늘린 교회는 마치 기운 누더기 같아 그 주변 200여 채의 판잣집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현 교회의 그런 모습은 가난 때문이 아니었다. 아현 교회는 그 일대 판자촌의 상당수를 소유할 만큼 재정적으로 풍족했다. 그런데도 교회는 건물을 짓는 데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대신 판잣집을 사들여 집 없는 교인들에게 나누어 살게 했고, 먹고살 길이 없는 교인들에겐 뒷돈을 대줘서 소금이나 고무신, 생선 장사를 해서 먹고살게 했다.
그런 교회를 만든 이가 바로 김현봉(1884~1965) 목사였다.
작은 키, 땅땅한 몸매에 눈매가 매서웠던 그는 언제나 머리를 삭발하고 있었기에 ‘중목사’로 불렸다. 그런 김 목사를 따르던 사람들은 신촌 창광교회와 염천교회, 신촌교회 등을 세워 그 뜻을 잇고 있다.
6.25가 발발하자 김 목사는 삼각산에 들어가 39일간 금식하며 기도하였다. 기도 중 회개기도가 터져 15가지 이상의 죄를 하나씩 고백하며 크게 은혜 받은 성령체험이 그의 목회생활에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이후로 교회가 크게 부흥되기 시작 하였고, 원고 설교에서 영감 설교로 바뀌어 설교 중에도 하나님의 영감이 계속 임했다.
전쟁 후에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이 너무 많이 생기게 되자 사회 복음화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 봉사와 구제 사업을 펼쳐 나갔다. 70의 나이에도 상관하지 않고 할 수 있는 대로 토요일에는 쌀밥과 고기 국을 끓여 배고픈 이웃을 대접하였다. 그래서 아현 교회에는 주일날 시내의 거지들이 다 모여들었다.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한 줄로 서게 하고 100원씩 주어서 보내기도 했다. 이때 교인수가 500명을 넘어섰다.
그는 기독교의 형식주의, 교권주의를 배격하는 동시에 교회건물을 크고 화려하게 짓는 일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교인이 늘어나면 자기가 손수 교회의 벽을 헐고, 예배당을 넓히면서 지붕도, 벽도 손수 쌓아 올렸다. 건물의 미관엔 관심이 없었고, 창문을 많이 내어 다만 위생적으로 태양 광선이 잘 들고, 예배드리기에 불편하지만 않으면 되었다. 교회가 산비탈에 있었기에 늘 정과 망치를 들고 바윗덩이를 일일이 깨 가며 예배장소를 확장했고, 기둥이 많아 일명 ‘기둥 교회’, 초라하여 ‘누더기 교회’라는 별명이 있었다.
주일날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 교인들을 보면 어느 피난민 수용소나 거지 떼들이 흩어져 나오는 광경 같았다. 그러면서도 전 교인이 십일조를 드리게 하고 연보는 김 목사 자신이 관리를 했는데, 그는 자녀가 없었기에 한 푼도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오직 전도와 구제하는데 쓰기에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모든 헌금은 진정한 영혼을 길러 주기 위해 수고하는 인근 교역자들과 신자들을 구제하는 일에 사용되었다. 그는 어떤 교단에도 들어가지 않고 독립교회로 있었다. 목사의 사례금은 교회에서 정해지지 않고 목사의 생활을 위해서는 별도로 연보함을 만들어 교인들이 자유로이 넣도록 했다. 주일날은 오전 예배를 마치고 사모가 국수기계로 손수 만든 밀국수를 전 교인에게 대접했고, 잠시 쉬었다가 오후 2시에 저녁예배를 드렸다.
결혼식은 교회에서 사경회 하는 도중 쉬는 시간에 신랑 신부가 평소 입던 옷 그대로 불러 앞자리에 세우고 “잘 살겠소?” 하고 묻고 기도해 주면 끝이었다.
김 목사는 자신이 길가에 나가 노방전도하고 교인을 늘려갔다.
다른 교회에서 불만이 있어 찾아오는 떠돌이 교인은 받지 않고, 친히 자기 손때를 묻혀 자기 나름대로의 독특한 교회를 만들어가며 성장을 시켰다. 70세 넘어 81세 별세할 때까지 그의 목양 일은 계속 하였는데 교인수가 1200명까지 되었다. 예배는 두 시간이나 길게 드리는데도 교인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남자 성도들은 김현봉 목사처럼 머리를 삭발하고 바지저고리 입는 사람이 많았다. 김현봉 목사는 키가 작으며, 삭발하고 항상 검은 두루마기에 검은 고무신을 신고 다녔기에 그의 별명은 “중 목사”라 했다.
그는 후배를 기르는 일에 무척 애를 써서 그의 영적 감화를 받고 그를 따르던 목회자들과 청년들이 많았다. 그중에 이병규(신촌), 백영희(부산 서부교회), 안병모, 이한영, 안길옹(알래스카에서 개척교회) 등이 있다. 김현봉 목사가 별세할 때까지 10여 년 동안 전도사로서 보좌했던 이경자(78) 전도사의 증언을 들어보자. 나이를 가늠키 어려울 만큼 젊은 이 전도사는
김현봉 목사에 대해 “얼굴에서 언제나 사랑이 지글지글 끓었던 ‘사랑의 사도’였다”고 전한다. 그의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김현봉 목사만큼 하나님과 단둘이 만나는 기도의 시간을 많이 가진 사람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오후 6시만 되면 잠자리에 들어 밤 12시에 일어나 묵상을 했고, 새벽 통행금지 해제 사이렌이 울리면 곧바로 연세대 뒷산에 돌로 만든 놓은 기도실로 올라갔다. 그는 그렇게 아침 해를 바라보며 점심 무렵까지 깊은 황홀경에 잠겨 있곤 했다. 김현봉 목사의 기도의 삶을 따라 그대로 실천해온 창광교회 이병규(83) 목사는 김 목사가 “세상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만 살았다”고 회고했다.
나중엔 아현 교회의 수많은 신자들까지 김현봉 목사를 따라 나무 하나씩을 정해 그 밑에서 정좌한 채 명상에 잠겨 연세대 뒷산 일대는 장관을 이뤘다. 그는 교회에서도 소리 내어 기도하지 못하게 했다. 동네에서 방앗간 하나 놓으려고 해도 동민들의 허락을 받기 전에는 못 놓는 법이라면서 기독교인들이 이성을 잃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든 상관없이 부흥회라고 떠들고 소란스럽게 해 이웃 주민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도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 찬송은 하나님과 연락해서 영혼으로 부르는 것이지 자기 육체가 흥분하자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고요히 하나님과 교통하는 가운데 회개해 양심을 찾아 자신을 만들어야한다는 게 그의 가르침이었다. 그는 누구든지 자기가 된 만큼 밖에 남을 만들지 못하는 법이니 요는 나 하나 만드는 일이 급선무라고 했다. 내가 바로 서지 못하고 누구를 바로 서게 하겠느냐는 것이다.
김현봉 목사는 산에서 내려오면 곧바로 교인들에게 심방을 갔다. 방에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안부를 여쭙는 문전 심방이었다. 대신 살림이 어려운 교인들 집에선 방에 들어가 연탄불을 지피고 있는지 바닥을 만져보고 쌀독을 들여다본 뒤 도움을 주곤 했다. 그는 늘 안주머니에 돈을 가득 담아 갖고 다니면서 즉각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주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에겐 돈을 쓰지 않았다. 평생 교회 지하의 방 한 칸에서 지낸 그는 고기도 먹지 않았고, 세 가지 이상의 반찬을 놓지 못하게 했다. 옷도 두루마기만 입고, 고무신만 신었기에 달리 돈 들 일이 없었다. 아현 교회에선 허세는 통하지 않았다. 교회도 그렇거니와 신자들의 사치도 허용되지 않았다. 남자들은 대부분 삭발했고, 여자들은 파마도 하지 못하게 했다. 결혼식도 20명 이상 참석하지 못하게 했다. 신자가 세상을 떠나면 24시간이 지난 뒤 예배를 올린 다음 손수 그 자신이 시신을 손수레로 끌고 가 화장을 했고, 아이가 죽어도 그가 직접 지게에 지고 가 산에 묻었다. 1965년 그가 숨을 거두자 교인들은 그의 뜻에 따라 시신을 손수레에 싣고 가 화장했다. 그러나 울지 말라는 그의 뜻을 지키는 교인은 없었다. 1200여 명의 교인들은 손수레를 따르며 통곡했다. 말만이 아니라 삶으로 보이는 목회자를 이제 어디서 다시 찾겠느냐는 눈물이었다.
김현봉 목사님의 목회 방침과 교훈의 특징을 좀 더 소개해 올린다.
(1) 목회 방침
1) 찬양대, 학생회, 청년회를 특별히 두지 않았다.
2) 주일성수 강조
3) 자발적 연보 가르침(헌금이나 선행은 하나님만 아시도록 비공개)
4) 친목회, 야외예배, 망년회, 찬양 새벽 송, 어머니주일, 약혼식폐지
5) 국산품 애용 강조
6) 삼분설 주장(영, 혼, 육)
7) 천국은 다 평등이 아니다(천국에서는 큰 자와 작은 자가 있다)
8) 목회, 치리, 재정, 유년주일학교, 심방 전담.
9) 한복을 즐겨 입으심.
10) 밥을 먹으라고 했을 때 먹었다고 하면 두 번 다시 권하지 않았다.
11) 하루 7-8시간 기도하셨다(15일을 앉아 계신 적이 있다고 함)
12) 점심은 항상 국수를 하시고, 국수를 대접하셨다.
13) 하루 수면 시간은 3-5시간뿐이다.
14) 오전 시간은 기도, 성경공부, 오후는 심방과 전도와 교회 일을 하셨다.
15) 장례는 리어카로 운반(심지어는 관이 없어도 무방)
(2) 교훈의 특징
1) 10대 특수 교훈
1 삼가하고 조심하라
2 양심을 똑바로 써라(양심과 말씀에 순종하는 정신을 가지라)
3 일심정력
4 구원을 이루라(성화구원)
5 명예, 영광심을 버리라
6 나 하나 만들라
7 사치하지 말고 검소하게 생활하고 풍속, 습관을 버리라.
8 지식중심주의를 버리고 믿고 실행하라.
9 인본주의를 버리고 신본주의로 살라.
10 개교회주의
2) 그밖에 강조하시고 가르치신 말씀들
1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기도하고 성경보고 묵상하라
2 예수 믿는 것은 남을 위하여 믿는 것이다
3 교회 직원 많이 내지 말라
4 참되고 진실 되고 정직하라. 옳고 착한 일을 하고,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고 용납하고 참고 견디고 덕을 길러라.
5 겉 사랑하지 말고 그 영혼에게 참 유익을 주는 참 사랑을 하라.
6 물질적 신앙적 자립정신을 길러라.
7 교회사업주의를 버리라.
8 결혼식 간소화
9 물질(돈, 전기, 의복, 음식, 건물)을 절약하고 남용치 말라.
10 자녀에게 어려서부터 믿는 도리를 가르치고 순종하는 법을 가르쳐라.
11 쉬운 것부터 믿고 실행해 나가라.
12 들어오는 대로 종횡으로 열을 맞추어 앞자리부터 앉아라.
13 마음을 모으고 정신을 가다듬고 고요한 장소를 찾아 기도하라.
14 이자놀이 하지 말고 계하지 말라.
15 강단을 꾸미지 말라(성경을 올려놓고 강도(講道)할 수 있으면 족하다).
16 예배시간을 엄수하고 약속을 지키라.
17 찬송가를 뜻을 생각하며 불러라.
18 혈기를 이겨라.
19 극장가지 마라.
20 우상의 제물, 피, 목매여 죽은 짐승 먹지 말라.
3) 목사에 대한 교훈('택함 받은 일꾼의 자격과 신덕', 딤전 4:10-16) :
택함 받은 일꾼은 열심과 힘을 드리며, 양을 자기의 뼈와 살과 같이 사랑하여 교인과 목자가 통하게 되는 것이다. 참된 일꾼은 어머니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과 같이 사랑이 쏟아져 나오고 피땀이 섞이어 나오는 것이다. 목자를 알아서 따라온다.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을 양들에게 보이어야 할 것이니 영혼의 키가 장성하는 것을 보이라는 말씀이다. 덕이 자라고 선의가 더욱 자라나는 것을 보이라는 말씀이다. 묵상, 성경 보는 일, 기도, 궁구하는 일을 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일, 잘 해야 한다. 참을 수 없는 것을 참고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면 먼저 자기가 은혜를 받는 것이며 연단하는 것이다. 전심전력을 강도(講道)에 기울여 해야 하는 것이다. 몇 시간 준비해서 하려고 하는 것은 품팔이 일꾼인 것이다.
교인이 온 것은 영의 양식을 먹으려고 왔는데 굶어간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연구가 부족하고 궁구가 부족하고 정도가 유치해도 일심정력을 기울여 공만 들이면 그 강도(講道)는 하나님이 가르치게 하는 것이다. 강단을 아무나 가르치게 양보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한 번 이단을 가르쳐 놓으면 여독(餘毒)이 심하다. 일꾼이 되려면 먼저 믿고 말씀을 사랑하고 자기가 먼저 실행하고 자기를 만들어 정직하고 진실하고 사람이 되어 가르칠 때에,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보아서 믿는 자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자기가 실행치 않고 입으로만 가르치니 마귀의 종이요, 자기가 되지 못하고 가르치니 못된 것 가르쳐 놓으니 결단날 일만 해놓는 것이다. 일꾼이 된 자는 피땀을 흘리지 아니하고는 못하며, 그리스도를 믿으려면 피땀을 흘리지 않으면 안 된다.
남을 불쌍히 여기고 실행하라고 하면서 자기는 얼마나 실행하는가? 앵무새와 같이 가르치고 지식으로만 배워서 가르치니 이런 사람으로 말미암아 도를 가리우는 것이다. 교인의 사정을 함부로 내놓으면 안 되는 것이다. 유익이 되지 않는 말은 내놓으면 안 되는 것이다. 어른이고 인도자인데 함부로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교회에 나오는 자를 모두 성자를 만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다 그렇게 되지 아니하는 것이다. 너무 다 잘 만들려다 낙심하기 쉬우니까 교인의 처지를 보아서 차차 잘 인도해야하며, 자라기를 바라고 길러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불완전하여도 쓰시는 것이다. 쓰되 길러가면서 쓰시는 것이다. 자기가 의로운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될 것이며 회개하고 바로 서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진저.
목자는 파수꾼이요 목자이니 나보다도 양을 위하여 바로 자기를 세워야 하는 것이다. 목자가 양을 위하여 희생하는 것은 본능이며, 내가 희생하는 것이 교인을 살리는 것이며 즉 나를 살리는 것이다. 교역자는 교회 일을 볼 때에 사람을 의지하여 일하면 안 되고 하나님과 손을 잡고 일을 해야 한다. 사람을 의지하니 하나님은 배척하고 사람이 교회를 세우려하니 되지 않는 것이다. 교역자는 남의 생명을 맡은 자이니, 육신의 오락을 취하지 말고 희생해야 한다.
자기가 연구해서 가르치는 것이 은혜가 되고 힘이 된다. 강도(講道)를 할 때 은혜를 받아 신자가 좋아한다. 그러면 자기가 잘 한 줄 아는 것이다. 그러나 일시적 감동인가, 행위가 변화하는가 보라.
4) 장로에 대한 교훈
장로가 교회를 지어서, 쥐고 펴고 하는 것이면 이는 장로가 할 일이 아니다. 장로가 교회의 주인도 아니며 목사도 주인이 아니요, 주인은 그리스도인 것이다. 금일 장로는 주인이요 목사는 품팔이꾼이 되는 것이다. 목사가 만일 장로를 책망하는데 받지 않으면 목사를 쫓아내는 것이다. 장로는 목사의 조력자이다. 현재 장로는 권세를 부리고 교회주인 노릇하여 일꾼 내쫓고 하는 것은 저주받을 일이다. 장로가 장로 일을 못하면 장로가 교회의 분쟁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5) 전도부인(전도인)에 대한 교훈
이북에서는 권사, 이남에서는 전도사라는 명칭을 교회에서 결정하였다. 현재 전도 일 안 하는 자를 성직 명칭으로 부르지 말라. 가난한 집에는 더욱 자주 가야하며 돕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다니되 입이 무거워야 하며 필요 없는 말은 아니 해야 한다.
흠점이 보이거든 자기가 권면하여 들을 만하면 하되 못할 것 같으면 목사에게 말해야 한다. 목사의 흠집을 교인에게 말하면 안 된다. 목사의 잘못이 있으면 직접 와서 목사의 잘못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자기 마음에 맞지 않거든 자기가 거기 있지 말고 다른 데로 가는 것이 나으며, 목사를 추방하는 것이 성공했다 할지라도 후에는 벌 받고 자기도 쫓겨나게 될 것이다. 충실히 일하지 않으면, 섭섭하지만 보내야 한다. 정이나 체면을 못 이겨서 두어두면 그 사람 망하고 교회 망하는 것이다. 전도인은 목사의 신앙 사상과 같아야 되는 것이다. 사상이 같지 않으면 진리의 혼란을 갖게 될 것이니 안 될 일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그 밑에서 전도 일을 할 마음이 있으면 신앙적 사상과 은혜를 받고 마음으로 주안에서 심복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6) 신자에 대한 교훈
부모는 육신을 기른 자이나 일꾼은 나의 심령을 기르는 자인 줄 알고 영혼의 선생인 줄 알고 고맙고 감사함으로 배워야 한다. 실행하기 위해 배워라, 말씀을 지식으로만 배우게 되면 양심의 자유를 못 누리니, 듣고 실행해야 한다. 예수 믿는 데 폐물 된 사람, 아무데 가나 사람 노릇 못한다. 이 좋은 교훈 배우지 못하는데 어디 가서 사람 노릇 하는 것 배우겠는가?
사람 노릇하려면 용서하고 참고 견디고 용납하는 마음을 길러야 한다. 이런 마음이 없으면 교회 일 잘 할 수 없는 것이다. 책망과 옳은 말을 해주면, '고맙습니다. 이것을 가르쳐주지 아니했으면 캄캄한 데 행할 뻔 하였는데 가르쳐주시니 참 감사 합니다'할 것이다.
옳은 것을 사모하는 마음, 양심 쓰는 마음, 이것 먼저 만들라. 먼저 마음을 돌이키고 자기 만들어 나가는데 힘써라. 자기가 타인에게 좀 낫다는 칭찬을 받는 자, 정신 차려야 한다.
잘못 하면 자기의 의(義) 그것만 의지하니 넘어질까 조심해야 할 것이다. 바른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망하고 말 것이다. 음식을 먹되, 덕을 세우기 위해 먹고 유익하려고 먹는데 해되게 먹으면 안 된다. 먹을 때에는 절제가 있어야 한다. 식물에 대한 절제, 이것도 선한 싸움이다. 기술과 지식만 배워 가지고는 안 된다. 인격이 없으면 그것은 악하기 때문에 자기를 망치는 것이다.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영적(靈的)으로 굵고 뚜렷한 흔적을 남긴 김현봉 목사님의 생애는 나를 심히 부끄럽게 했고, 나 자신을 되돌아보며 새롭게 회개하고, 이제부터라도 더 늦기 전에 모든 것을 원점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도록 하는 감동하심과 생의 전환점(turning point)의 계기가 되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다. 세월이 많이 지난 오늘날에도 한국 교회 초기의 신앙을 사모하는 현장이 이처럼 아직도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희소가치(稀少價値)에 정겹기까지 하다. 나는 이런 꾸밈없는 영적인 분위기를 보았을 때 어색하기는커녕 어린 시절 고향교회에 돌아온 느낌이었다. 오리지널 초대교회와 같은 순수성을 유지 보존하려는 모습들이 눈물겹게 고마웠고 우리 땅에 이런 분들을 심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여기에는 특별한 신학교가 없다. 단지 사경회를 통하여 그 영맥(靈脈)을 이어간다. 강성률 목사님은 대학에서 국문학을 공부하셨는데 은혜 받고 신학을 하고자 했을 때 스승 고 안병모 목사님께서 만류하셨다고 한다. 신학 잘못하면 오히려 못된 것만 배우고 자칫 해가 될 수 있다는 말씀에 순종하셨다고 한다. 아래의 일화를 보면 안병모 목사님이 왜 신학을 만류하셨는지 이해가 갈 것이다.
【나 귀한 말 들었어. 언제 김현봉 목사님, 직접은 못 들었는데 김현봉 목사님이 어떤 학자의 저서를 보고서 '그것은 생명이 없는 죽은 글이요 책 보따리다' 이라더래요. "왜 그렇습니까?" 하니까. "암만 읽어 봐야 '이 사람은 이라고 저 사람은 저라고 그 사람은 그라고 이렇고 저렇고 저렇고 이렇고' 이런데 너는? '뭐이 옳은지 나는 모르겠다.' 이것도 저것도, 이라는 사람 소개만 했기 때문에 죽은 글이지 산 글은 아니라 말이오. 모두 그래만 해 놨지 자기는 이거라 하는 거 하나 잡고 있는 그게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의 생활이 한 길을 택할 리가 없고 팔방미인으로 이 사람 만나면 이것도 좋다 저것도 좋다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에. 대개 학자들의 신앙 걸음이 너무 폭이 넓어 그런 게 아니라 생명이 없어서, 요게 산길이라 하는 그것을 단정 짓지 못한다 그 말이오...."
이것도 쉬운 말 아닙니다. 아주 어려운 말입니다. 그 김현봉 목사님이 큰 말 했습니다.
어려운 말했습니다.】
강성률 목사님은 안병모 목사님께 한 20년 쯤 배우셨을 때, “이제 그만하면 됐다” 하시면서 목사안수를 주셨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참된 하나님의 종은 세상 학식이나 교단 신학을 이수한 것이 그 기준이 아니라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김현봉 목사님을 따르는 제자들 가운데는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 곧 결혼의 행복도 스스로 포기하고 온전히 하나님 섬기는 일에만 몰두하시는 분들이 많다.
이 얼마나 거룩하고 아름다운가!
오늘 날은 보다 더 세련되고 편하고 쉬운 것을 추구하는 세상이다.
그런데 김현봉 목사님의 영맥(靈脈)을 이어가는 그 제자들은 한결같이 역으로 거슬러 좁은 길, 십자가의 길로만 가려고 한다. 이들은 심각하게 병든 시대에 항거하는 상징적인 몸짓 그 자체다.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고 작정한 창조적 소수들이다. 나는 이분들이 있어 힘이 나고 행복하다. 여기저기 보이는 삭발한 민머리의 성도님들...
이분들은 일찍이 세상과의 단절을 몸과 마음으로 체험하셨던 고 김현봉 목사님의 신앙과 삶을 흠모하여 따르는 거룩한 빛의 사람들이다. 우리는 천국복음 신앙을 대할 때, 있는 그대로의 순수한 본질로 돌아가야만 한다. 말만 무성한 지식 신앙은 죽은 것이다.
오늘 날은 겉포장이 대세인 세상이 되었다. 기회만 나면 육신을 즐겁게 하기 위해 바쁜 세상이 되었고, 내용보다는 형식이 앞서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그래서 오늘 날 세상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씀을 여간해서는 듣지 않고 또 들을 귀도 없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가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가지 않겠노라 하였으며’(렘 6:16).
이러한 때에 온고지신(溫故知新) 이라는 말이 새롭게 들려 진다.
옛것을 익히고 그것을 통하여 새것을 알게 되기를 기도한다.
바울 사도는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6:17) 라고 했다. 우리 모두 영(靈)의 흔적을 몸에 지니고 사는 성령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소원해보자. 우리 곁에 이렇게 순전한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 말씀으로만 신실하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다시 한 번 세상을 긍정하고 뿌듯한 감사로 하나님만 바라볼 용기를 얻는다. 감사합니다. 모든 영광 하나님께 돌려드립니다.
*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예수님께 한 것이다.
마음이 낮아져서 비천한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으로 알고 섬겨야 한다
(마 25:40; 눅 9:48, 16:10).
*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보여줌으로써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보고 구원받게 해야 한다.
하나님의 선교방법은 사람을 통해서 보여주는 선교에 있다(마20:26-28).
* 주님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말씀하신다.
하나님을 보여주려면 하나님처럼 되어야 한다
(신7:6-7; 벧전2:9; 마20:26-28, 23:11-12, 25:35-40).
* 하나님의 나라는 자신의 작은 것을 희생하여
전체가 기쁨과 행복을 얻게 되는 그런 어떤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할꼬?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마 13:33; 요 12:24-25).
수정증보될 '말숨' 글 (2): 사명의식 하나로 우뚝 선 신앙의 거목(巨木) 박남일 목사
1. 남원 상동교회 부흥성회
2015년 을미년 새해 첫 달도 막 지나가려던 어느 이른 새벽이었다.
전혀 뜻하지 않은 전화가 걸려 와서 무슨 일인가 싶어 긴장했다.
“염 소망 목사님(구명: 염동권)! 잘 지내셨습니까?
저는 남원 시골에서 목회하고 있는 상동교회 박남일 목사입니다.
방금 목사님이 보내주신 메일 편지 ‘말숨’ 글을 읽고 성령님의 뜨거운 감동이 와서 이른 새벽이지만 실례를 무릅쓰고 즉각 전화 올립니다. 저는 목사님이 꾸준히 보내주시는 ‘말숨’ 글에 은혜를 받고 성령님의 감동하심을 느끼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저희 교회가 새해 들어 심령부흥 성회를 준비하고 있는데 목사님을 꼭 한번 모시고 싶습니다. 저희 상동교회는 비록 먼 곳에 있는 작은 시골교회이지만 오셔서 2월1일 주일 저녁부터 수요일 밤까지 목사님이 만나고 체험한 하나님에 대해서 간증설교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남원시에서도 좀 떨어진 곳에 위치한 저희 상동교회는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150여 성도님들이 굳건히 자리를 지켰고, 시골교회 치고는 제법 큰 교회였습니다. 남원 시내에도 젊은 성도님들 20-30 세대가 있어서 목회가 활기차고 재미도 있었는데 세월이 흐른 지금, 젊은이들은 하나 둘씩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떠났고 지금은 70여 성도님들만이 교회를 지키고 계시는데 늙고 병든 노인 분들이 대부분 입니다. 그러니 아무 부담 갖지 마시고 편한 마음으로 오셔서 쉽게 말씀 증거 해 주실 수 있습니까? .....”
나는 즉석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같이 부족한 사람을 천국잔치에 초청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여 기도로 준비하겠습니다.”
내가 박남일 목사님을 처음 만난 것은 1981년도 한신대학교 수유리 캠퍼스에서 였다. 졸업을 앞두고 있던 나는 강원도 인제 출신의 장애인 신학생이 한신대학교 총학생회장(1982년)을 맡고 있다는 말에 같은 강원도 사람이라서 그런지 그 어떤 자랑스러운 쾌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어떤 인물인가 싶어 궁금했는데 마침 만나게 되니 무척 반가웠다. 서로 만난 우리는 신앙과 시국 정치에 관한 대화를 진지하게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당시 전두환 군부독재가 철권정치를 하고 있었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교회는 어떻게 책임 있는 삶을 살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 시대의 화두(話頭)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는 왼손이 없었고 게다가 오른쪽 눈마저 실명상태였다.
그는 이런 장애인 신학생이었기 때문에 짠한 마음에 특별한 연민의 정을 느꼈고,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언제 어쩌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마음에 상처가 될까봐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속으로 안타까운 걱정만 하고 있었다.
“이 후배가 어수선하고 살벌한 이 시대에 한신대학교 총학생회장직을 맡고 있으니 민주화 운동이다 뭐다 하면서 제대로 졸업이나 할 수 있을까? 혹시 시대의 사명감 때문에 옥고(獄苦)를 치르게 될지도 몰라. 그러면 어쩌지 어쩌지?”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여러 번의 위기를 맞아 안기부의 추적을 피해 도망을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무사히 한신대학교를 졸업(1984년)하고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까지 졸업할 수 있었다(1987년 조직신학 전공).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고 신학 3학년 때는 길음동에 있는 양광교회 전도사로 일하면서 목사안수를 받기 전까지 줄곧 양광교회에서 헌신했다. 기개 있는 순수한 인품과 실력을 겸비한 그는 양광교회에서 믿음 좋고 성품이 착한 처녀 민흥기(22세) 양과 만나 마침내 사랑의 꽃을 피워 결혼한 후 처음 목회지로 부임한 곳이 바로 지금의 남원 상동교회다.
2. 박남일 목사님의 유년시절과 하나님 체험
박남일 목사님은 1958년 6월 24일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진다리라고 하는 두메산골에서 가난한 불신자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하루 먹을거리를 걱정해야 하는 가난한 가정에 집도 땅도 없어 남의 일을 해주고 살아가는 아버지와 어머니였다. 가난에 견디다 못한 아버지는 누나와 여동생 3남매와 어머니를 남겨두고 돈 벌어 온다고 하며 집을 나가신 후 8년 동안 연락이 없었다. 어머니는 3남매를 데리고 친정 근방으로 이사 와서 남의 집 셋방신세를 지며 자녀를 키우셨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추억이 별로 없다고 한다. 초등학교 가면 다른 아이들은 아버지를 말하는데 그는 아버지를 말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막연히 아버지가 돈을 벌러 갔는데 돌아오면 우리도 쌀밥 먹고 고기 국물도 먹을 수 있다는 희망을 말해 줄 뿐이었다. 활달하게 뛰어 놀다가도 ‘아버지 없는 자식’ 이라는 말을 들으면 괜히 우울해졌다.
어린 시절 먹을 것이 없을 때 남의 집 먹다 남은 밥을 얻기 위해 구걸했던 때도 있었고, 모내기철이 되면 일찍 학교에서 돌아와 남의 집 모내기 심부름, 이를테면 모를 날라주거나 못줄 잡아주기 같은 일을 해주고 먹다 남은 일꾼들의 밥을 얻어먹었던 기억이 난다고도 했다.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고, ‘나는 빌어먹고 사는 놈이다’라는 말이 실감난다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도 목사가 되어 하나님께 빌어먹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눈물의 빵을 먹어 보지 못한 자와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이 있듯이 어린 시절 늘 배가 고팠고 모든 것이 충족되지 못한 유년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죄 아래 운명적으로 태어나 주어진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가를 그는 너무도 일찍이 온 몸으로 알아버린 것이다. 다행히 그는 어릴 때부터 활동력이 있어서 운동을 좋아했고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잔병치레 없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었다.
그런데 1968년 2월, 열두 살 때 폭발물 사고로 그의 삶에 큰 전환점이 일어났다.
두 명의 남자 친구와 여자 후배가 6.25 전쟁 때 땅에 묻혀있던 무기를 두드리면서 장난질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피식 치익’ 하면서 연기가 났다.
위험을 직감한 그는 재빨리 뺏어 왼손으로 잡고 던진다는 것이 그의 손에서 펑하고 터졌다. 불운이었다. 이 사고로 그는 왼손과 오른 눈을 크게 다치고 말았다.
강원도 두메산골에서 일어난 뜻하지 않은 이 사고는 교통이 발달되어 있지 않아 생명이 촌각에 달렸다. 그런데 모르는 동네 아저씨가 피 묻은 그를 들쳐 업고 달려서 가까스로 목재 실어 나르는 트럭을 만나 70리 길의 읍내에서 급하게 수술하여 살아나게 되었다. 그런데 수술비도 없고 열악한 의술 환경과 너무도 어려운 상황에 그는 왼손을 절단하게 되었고 오른쪽 눈도 실명하게 되었다.
다른 친구들은 모두 무사했지만 그는 한순간에 귀중한 신체의 일부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지금까지 50년 장애를 안고 살아야 하는 뼈아픈 삶은 이렇듯 어이없게 시작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품을 떠나 죄 아래 존재하는 운명적인 세상 성(世上 性)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게 볼 수만은 없다.
고난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신학이 밝혀내고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다.
목사는 다른 직업과 달라서 고난의 문제를 존재의 본질에서부터 이해하고 터득할 수 있어야만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그의 남다른 삶의 고통과 시련의 체험은 어쩌면 그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하나님의 섭리 아니었을까 생각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종으로 귀히 쓰임받는 하나님의 작품들은 흔히 그런 식으로 빚어지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남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이 희생되어졌다는 이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제물(代贖祭物)의 의미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인데, 어쩌면 삶의 아름다운 궁극(窮極)의 꽃을 피우기 위해 그의 고난으로 가득 찬 목회자의 일생을 예시(豫示)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이렇게 다쳐 있는 상황에서 8년 전에 집을 나가신 아버지께서 고향집으로 돌아오셨다. 그 이후 그에게는 4명의 동생들이 더 태어나게 되어 그의 형제는 7남매가 되었다. 이런 복잡한 상황에서도 그는 학교생활에 충실하며 열심히 공부하여 중. 고등학교를 좋은 실력으로 다니게 되었다. 마침내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여 법학을 공부하려는 꿈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병환과 갑작스런 죽음으로 모든 꿈은 좌절되고 낙심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답답한 처지에서도 그의 인생에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던 것은 1977년 2월부터 동네에 있는 귀둔 감리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것이 그것이다. 교회에서 싹튼 하나님 신앙의 끈이 그를 절대 절명의 순간마다 붙잡아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어렴풋이나마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 그러나 깊은 영적인 은혜의 세계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여전히 그에게 부딪혀 오는 인생의 의문들은 여전히 좀처럼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것이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자기를 왜 이렇게 고장 난 사람으로 만들어 놓고 무엇을 하시려는지 해답을 찾지 못해 더욱 힘들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농사일과 약초장사 그리고 저녁에는 고등학교 다닐 때 쌓아둔 실력으로 군부대 자녀들을 과외지도하며 교회생활도 열심히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는 사람의 의지로 하는 것이었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치 못하고 습관대로 교회생활을 하는 것에 불과 했다.
그러고 보면 성령체험으로, 몸으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후일
그는 절실히 깨닫게 된다. 성령의 체험적인 신앙 아니고서는 요동치는 세상에서 반석위에 선 믿음을 갖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흔들리는 믿음때문에 그는 여전히 죽을 만큼 외롭고 쓸쓸한 고독감에 사로잡혀야 했고 너무도 삶이 힘들 때면 자살을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이렇게 살아서 무엇 하는가?” 하는 허무한 생각이 들어 1979년 1월 캄캄한 밤에 동네 뒷동산에서 자살 하려는 생각으로 농약을 갖고 봉우리에 올라갔다. 1월이니 살을 여미는 추위였지만 눈은 오지 않고 있었다. 농약을 마시려는데 지난날 자기가 도무지 살수 없는 가운데서도 가까스로 살아 난 것과 어머니와 그리고 동생들 생각이 나면서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 졌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 하나님! 살려주세요!”부르짖으며 외치기 시작했다. 얼마나 울고 또 울었는지 정신이 몽롱해질 때 작은 콩 알 만 한 불덩이가 멀리서 나타나더니만 점점 가까이 다가오면서 큰 불이 되어 그를 덥쳤고 자신의 입속으로 삼켜지는 것이었다. 그 순간 그는 의식을 잃고 말았다.
얼마 후 그를 부르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 음성은 그가 평소에 좋아하고 믿고 의지했던 바로 그 말씀, 이사야41장 10절이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러한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깨어나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온통 온 세상에 눈이 내렸는데 놀라운 것은 그의 주위 반경 1미터에는 얼마나 헤매고 부르짖었던지 눈이 다 녹아 있었다. 그 순간 그의 마음에 강 같은 평화와 새 힘이 넘쳤다. 산 아래 동네의 교회 십자가가 그의 눈에 들어 왔다. 새벽이었다. 그를 고쳐 살려주시고 만나 주신 하나님께 그는 감사 찬송을 올리고 또 올리며 기쁨의 춤을 덩실 덩실 추었다.
산을 내려온 그는 예배당으로 가서 365일 새벽 작정기도를 시작했다.
마른 막대기를 들어 쓰시고, 쓸모없는 돌들로 외치게 하시는 하나님은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을 들어 쓰시는 분임을 깨닫고 그는 1980년 3월 한국 신학대학에 입학했다. 자신은 감리교회를 다니고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교파 같은 것은 관심 밖이었고 다만 신학 교수가 되려면 학문성에 인정을 받고 있던 한신대학교를 가는 것이 좋다는 소문을 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신비한 영적인 체험은 두고두고 그의 평생에 목회를 이끌고 나가는 밑바탕 힘이 되어주었고, 위기의 순간에도 그를 다시금 일으켜 세워주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는 한국 신학대학에 입학하여 고난 받는 민중에 대해서 깊은 이해를 가지게 되었고 동시에 십자가의 신학을 배우게 되었다. 가난하고 헐벗고 병든 자 소외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야함을 깨닫게 된 것이다. 1984년 학부 졸업과 더불어 신대원을 공부하면서 서울 양광교회 전도사(당시 담임목사: 김복기 목사)로 사역하였다.
그리고 민중들의 아픔을 깊이 알고 싶어서 1985년 당시 구로공단지역에 개척교회이고 민중교회였던 사랑교회(당시 담임교역자: 김광훈 목사)를 평일에 틈만나면 찾아가서 봉사하고 섬겼다. 그러다 1986년 9월 5일 가난하고 소외된 농촌교회인 현재 시무하는 남원 상동교회에 부임하였다.
3. 남원 상동교회의 역사는 곧 신앙의 거목 박남일 목사의 생애다.
남원 상동교회는 1955년 3월 15일 남원제일교회의 개척지원을 받아 시작되었는데 도무지 교회 공동체가 꾸려지지 않아 전북노회에서는 폐 교회 수순을 밟고 있던 중이었다. 교회 재산이라고는 땅도 교회 건물도 없었다. 빌린 남의 땅에 대충 지은 무허가 건물이 전부였고, 남자 성도는 아예 없었고, 15명 정도의 교인들이 모이고 있었다(제직은 7명). 헌금이라고 해봐야 일년 총 결산액이 고작 140만원 정도에 불과한 열악하기 이를 데 없는 교회였다. 교회 형편이 이러하니 그 누구도 지속적으로 목회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뜨거운 성령의 사람, 박남일 목사님과 민흥기 사모님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용감한 개척자였다. 그야말로 맨 땅에 헤딩하는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돈도 명예도 아무것도 없었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라는 하나님의 비밀이 있었다. 무쇠도 녹일 영혼 사랑과 하늘이 듣는 기도 그리고 자기를 희생하는 헌신으로 전도하고 가르치고 또 가르쳤다. 이런 그에게 성령님의 아낌없는 후원하심은 당연한 것이었다. 예수 이름으로 병든 자를 안수기도하면 치유의 이적이 나타나고는 했다.
그는 가난하고 병들고 배울 기회를 얻지 못한 동네 주민들을 품기 위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다 찾아서 했다. 한글학교를 세워 글을 깨우치고, 불우한 노인을 섬기기 위해서 무료급식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노인선교를 위하여 노인대학도 만들었다. 그는 농민운동과 사회변혁 의식화 운동에도 뛰어들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에 온 정열을 바쳐 최선을 다해 보았지만 교회는 더욱 어려워져 감을 깨닫고 자신의 마음을 치며 하나님 앞에 회개 기도하다가 10년 전 신학교 가기 전에 체험했던 성령의 불을 다시 경험하게 되었다. 이러한 영적인 체험을 계기로 하나님의 뜨거운 영성을 다시 회복하고 성령운동에 매진하니 그때부터 교회가 부흥되어 가기 시작했다. 여러 교회에서 부흥회도 인도하게 되었고,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자신을 통해 하나님을 증거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병을 고치는 신유(神癒)의 은사도 허락하셨다. 성령님이 도우시는 이러한 목회활동에 힘입어 그는 1991년 9월에는 사택을 건립(22평)했고, 1994년 11월에는 성전을 건축(110평)했다. 그리고 2008년 11월에는 재가 노인 복지관을 건립(85평)하기에 이르렀다. 그 외에도 한글학교, 이웃 집수리 해주기, 노인대학, 노인복지센터, 캄보디아 단기선교도 했다. 이러한 목회사역을 통해서 은혜의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치유(治癒)의 역사를 놀랍게 나타내 주셨다. 한마디로 모든 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다.
이를 계기로 수많은 불신자가 주님 품으로 돌아왔다. 자살하려는 자가 마음을 돌이키고, 간질환자의 더러워진 영도 쫓아냈다. 담석증과 장 천공환자, 좌골신경통, 위암환자, 정신 질환자 등등 각색 병든 자들이 치유 되었고 수많은 하나님의 살아계신 능력의 역사를 보여 주셨다. 그는 부족한 종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를 겸손으로 증거하기를 원한다. 자기는 부족하지만 자기를 들어 쓰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부족한 종을 통해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만 있다면 그 무엇인들 마다하겠는가" 라고 그는 힘주어 말한다.
그는 아무런 욕심도 없어보인다.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께만 영광 돌려드리기를 소원하는 것, 그것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몸의 가시를 위해 3번씩이나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지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는 응답을 받고 가시가 은혜임을 깨달아 알고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친 것처럼 그는 몸의 가시를 평생 안고 살면서도 하나님의 불을 받은 이후에는 불평하고 원망해 본적이 없다고 말 한다. 오히려 그 반대로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가시를 주신 까닭은 자만과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임을 고백하고 있다. 만약 하나님이 자기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지 않았다면 지금 멸망의 도가니 속에서 세상쾌락과 향락에 빠져 신음하는 연약한 존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있는 육체의 가시를 감사하며 자만하지 않고, 생명이 다할 때 까지 진실 되게 뜨거운 열정으로 사명을 감당하고자 하는 소원이 생겼으니 얼마나 감사 한가 라고 고백 하기까지 한다.
또 다른 한편,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 닦았다.
2008년에는 사모님과 함께 송원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하고 사회복지사가 되었다. 자기를 비운 한 사람의 열정과 헌신은 눈부시기 이를 데 없는 업적을 남긴다는 것을 그는 여실히 보여주었다. 현재 그는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운영위원과 전북동 노회장으로 있으면서 최근에는 사회복지 법인 한기장 복지재단 이사회 이사로 선출되었고, 기장총회 부흥 선교단 공동단장으로 기장 및 초교파 부흥집회를 120여회 인도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기 몸을 날려 헌신하면 기적이 일어난다.
성령에 기초하면 불가능은 없다.
그 누구도 시골교회라고 목회가 안 된다고 말하지 말라.
나 같이 고장 난 장애인 목사, 그것도 쓰레기처럼 거덜 난 인간 패잔병도 긍휼히 여기시고 들어 쓰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근본이 소망의 하나님이시다.
'말씀의 빛' 교회 염 동권 목사님과 한옥순 사모님을 보라!
염 목사님이 의학적으로 죽음을 경험할 때 '사명이 있는 자는 죽지 않는다'는 믿음과 소망을 갖고 기도 했을 때 죽은 자도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불러내시는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온전히 소생케하는 은혜로 살려 주셨다. 이를 계기로 아예 이름도 염 동권을 염 소망으로 개명하셨다. 이렇듯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마인드는 영성을 회복하는 성령운동의 기초다.
성령 충만이 결여된 사회변혁 운동은 그 한계가 자명하다.
교회와 우리 사회가 살려면 먼저 성령님을 통해서 심령이 변화되고 부흥되어야만 한다.
하나님의 영적 체험은 갖가지 성령님의 선물 곧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치유의 역사가 나타나게 한다. 불모지에서도 들어 쓰시고 마른 막대기를 들어 쓰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매일 매일 승리하며 살아갈 때 거기서 설교의 힘도 솟아나고 목양(牧羊)의 지혜도 얻게 된다. 말하자면 내 삶과 내 몸에서 하나님이 능력으로 나타나 주시는 것이다. 그럴 때만 강퍅한 성도님들도 눈물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고 천국복음은 전파될 수 있다.
하나님은 이름없는 무명인(無名人)을 들어 쓰시는 하나님이시다.
나는 염 소망 목사님이 상동교회 집회에 오셔서 말씀 중에 흘리신 눈물을 이해한다.
나는 고장 난 인간, 마른 막대기만도 못한 나를 만나주신 하나님을 오늘도 온 몸으로 증거 하고자 한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5-29).】
참으로 그렇다. 하나님은 사람을 쓰실 때 온전히 자아가 깨어지고 부서진 사람을 쓰신다. 지금까지 박남일 목사님과 운명을 같이 한 상동교회는 60주년을 앞두고 있는데 진실로 눈물겨운 세월을 느끼게 한다. 박남일 목사님의 그 출중한 기백과 실력 그리고 인품(人品)을 두고 보면 목회지를 몇 번 옮기고도 남을 법 한데 아무런 사심이 없는 그는 불모지나 다름없는 이곳 시골교회 현장을 단 한 번도 떠나지 않았다.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물다.
모든 목회자들이 거울 삼아 본받지 않으면 안될 귀감사례(龜鑑事例)가 아닐 수 없다. 인간적인 면에서 볼 때 아쉽고 아깝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런 정직하고 진실되고 유능한 목회자가 좀 더 큰 교회로 가서 좀 더 큰 영향력을 끼쳐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짧은 사람의 생각일 것이다. 오늘 날 목회자들 세계에서조차도 출세욕에 눈이 먼 세상처럼 오지나 마찬가지인 이런 소외된 임지는 철새처럼 거쳐 갈 뿐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지배적인 통념처럼 되어버렸다. 이는 심히 안타까운 일이요 일종의 정신적인 타락이라고 보아야 맞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황무지나 다름없는 상동교회에 와서 동안(童顔)의 청년시절부터 중년을 넘어 노년기로 접어드는 이 순간까지 한 눈 팔지 않고 상동교회를 살리고 섬기는데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헌신했고, 그 결과 지역사회에 깊이 뿌리박은 건강하고 자랑스러운 오늘의 상동교회를 일구어 냈다.
남원시 주생면 상동리 시골동네에 들어서면 가장 크고 반듯하게 지어진 제일 좋은 건물이 우뚝 서있는데 그것이 상동교회요, 재가 노인복지 센터다.
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아름다운가!
도시의 개척교회 성공사례는 수많은 사람들 입에서 회자(膾炙)되기도 하고 때로는 칭찬과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세속적인 가치관과 물량주의가 빚어낸 허구적인 환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도대체 목회의 성공기준이 무엇인가? 웅장한 건물이나 사람이 얼마나 모이느냐에 달린 것인가? 우리는 본질적인 차원에서 볼 것을 보고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 좋으신 하나님께서 이곳을 거룩하게 구별하시어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과 눈을 이 성전에 두시고 항상 지켜보시면서 부르짖는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집인 것이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시골교회 현장에 사명의식 하나로 우뚝 서서 신앙의 거목(巨木)이 되신 박남일 목사님! 그의 헌신적인 거룩한 생애는 곧 상동교회의 역사와 다름아닐 것이다. 그는 우직하게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한 평생을 초야에 묻혀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이 됨으로서 상동교회는 그 값진 사랑의 수고와 피눈물을 먹고 자랐기 때문이다.
상동교회와 지역주민들은 박남일 목사님을 말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 이 지역 구석구석에 그의 애환이 담긴 눈물의 기도와 사랑의 흔적이 아로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신앙의 거목이 된 그의 목회 여정은 오늘의 한국교회를 일깨우는 경종이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이것이 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와 우리 교회들에게 주시는 귀한 메세지가 아닐까 한다.
나는 심령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어느덧 머리가 희어지고 주름살이 깊어져 가는 목사님의 얼굴에서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하나님의 권위를 느꼈다. 그것은 마치 상동 시골마을을 지켜내기라도 하는 듯 그 오랜 세월 양 갈래 길 한가운데 우뚝 서서 삶과 역사의 진실을 알려주는 오래된 거목(巨木), 바로 그것이었다!
30여년 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 상동교회 한 교회만을 섬기면서 살아오신 신앙의 거목(巨木) 박남일 목사님! 당신은 식어져 가는 한국교회에 살아있는 영성을 불어넣고 싶어서 성령운동의 꿈을 지금도 꾸고 있습니다. 비록 시골에 있는 작은 교회이지만 치유 영성 센터를 건립하고자 하는 진실하고 절실한 소원을 갖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영성회복 운동만이 오늘의 죽어가는 교회와 사회를 살릴 수 있다는 하나님의 영적 체험이 목사님에게는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거목이 되신 사랑하고 존경하는 박남일 목사님!
부디 남은 목회 사역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어 하나님의 위로와 생명과 평강이 넘치는 행복한 목회되시기를 두 손 모아 빕니다. 감사합니다. 모든 영광 하나님께 돌려드립니다.
2015. 2. 8. 주일 새벽에. 염 소망 목사.
*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벧전5:2-4).
* 하나님께 은혜 볼 것을 믿으라.
강하고 담대하며 하나님의 얼굴을 항상 찾으며
여호와를 바라라(시105:4 수1:5-9).
* 내가 삶의 혹독한 시련을 맞았을 때,
죽음 앞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이 나를 특별히 만져 주셨다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난다(마9:20.마17:15-18).
* 하나님은 우리에게 해요 방패이시다.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신다. (시84:11)
*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아끼지 않았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모든 것을 다 주셨다.
(창22:12-18 히11:8-12)
수정증보 될 말숨 글 (3): 하나님 만남의 복, 축복의 문이 열리는 복.
목회 일선에서 은퇴하시고도 어려운 가운데서도 자비(自費)를 들여 지속적으로 중국을 오가시면서 천국 복음을 열심히 증거 하시는 박정도 목사님이 계신다. 철의 장막 공산치하에서 복음을 듣지 못한 영혼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그 영혼사랑 하나 때문에 나이도 잊어버리시고 물질도 허비하시기를 기뻐하신다. 평생을 시골에서 목회하셨기 때문에 중국 선교를 다닐 여력이 전혀 없지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서든지 그때그때 필요한 물질을 주시기 때문에 이 일을 계속 하고 있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나는 무척 감동을 받았다.
바로 이 귀하신 목사님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義)의 길로 인도 하시는도다.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토록 거하리로다’(시23편 요약) 라는 말씀이 확증되고 있기 때문이다.
박 목사님은 ‘하나님을 만나면 인생의 방황이 끝나고, 복음을 만나면 축복의 문이 열린다’ 라는 표제를 가슴에 품고 다니시면서 천국복음을 전하시는데, 흑암의 땅에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어가는 모습을 볼 때면 밀려오는 영혼의 감격 때문에 말로 다 할 수 없는 행복을 고백하게 되고 뿐만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현존을 직접 몸으로 느끼고 점점 크게 다가오는 천국의 소망과 기쁨 그리고 삶의 가치와 보람을 확인하게 된다고 말씀 하신다.
사실 박 목사님께서 품고 계시는 표제 속에는 성경의 모든 내용과 영적인 비밀들이 압축되어 있다. 어느 한 개인이나 가정, 사회나 국가를 막론하고 하나님을 만나기만 하면 복이 시작되고, 하늘의 생명이 열리기 때문이다.
지구상에 비교적 잘 살고 있는 나라들의 대부분이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나라들인 것은 그 좋은 경우라고 볼 수 있는데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정말 어째서 그럴까?
하나님은 모든 것의 시작이요 끝이시기 때문이다.
천지만물의 기원이 '스스로 계신 자'라 일컫는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이고, 온갖 만 가지 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시고, 기력(氣力)의 시작도 하나님이시고, 그 좋은 금은보화와 권세 그리고 온갖 진선미(眞善美)의 총화(總和)가 하나님의 이름에 있기 때문이다. 죽음과 흑암을 쥐고 있는 어둠의 권세자 마귀를 심판하고 온갖 고통과 저주받게 하는 더러운 귀신을 내 쫓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여는 권세 능력도 오직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성경에서는 다양한 표현을 써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영원 영원 영원하시고 거룩하신 성령(聖靈)이신 분, 스스로 있는 영존(永存)하시는 아버지 곧 모든 것의 조상, 바로 그 때문에 그 어떤 무엇과도 비교되기를 거부하시는 절대지존자(絶對至尊者), 천지의 주재(主宰), 모든 생명과 진리의 근원자이신 아버지. 그 분이 뜻하시면 그것이 곧 법이 되는 궁극적인 입법자와 재판장이 되시는 분,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불러내시는 전능자, 지혜와 지식이 무궁무진하신 기묘자(奇妙者), 병법과 모략에 능하신 모사(謀士), 하늘 천사들과 모든 인류를 말씀으로 낳으신 모든 영들의 아버지, 절대 은총과 절대 사랑으로 복과 생명을 주시는 선한 목자, 하늘 천사들도 꿇어 경배 찬양하는 절대 엄위하신 창조자, 은혜의 경륜과 섭리를 펴시는 역사의 주관자,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내 형질과 조직과 체질을 아시고 나를 섭리하시는 분,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 홀로 뛰어 나사 빛 가운데 스스로 영생하시는 분, 아무도 볼 수 없고 또 이름조차 함부로 부를 수 없는 크고 두려우신 분, 그 분만이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신 분, 만왕의 왕 만주의 주, 그분만이 의롭고 선하신 분, 궁극적으로 공평과 정의로 악을 멸하시고 심판주로 하나님의 의로움을 실현하시는 분, 사람 손으로가 아니라 하나님 친히 빚어 만드신 천국을 은혜 받은 사람에게 기업으로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자비하신 분, 은혜와 사랑으로 모든 죄악을 사하시고 모든 병을 고치시는 구원자,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는 치료자, 인자와 긍휼로 면류관을 씌어주시고 네 청춘을 독수리처럼 새롭게 하시는 분, 나의 심령을 감찰하사 내 마음 가장 깊은 곳도 꿰뚫어 아시는 분, 마음의 진실만이 통하고 기뻐 받으시는 분, 하나님의 기뻐하심으로 인하여 마른 땅이 샘이 되고 염전도 옥토가 되게 하시는 분, 죄악으로 인하여 분노하사 샘이 마른 땅이 되게 하시고 옥토가 염전이 되게 하시는 분, 마음을 낮추어 회개하고 돌이켜서 부르짖어 기도하면 하늘에서 들으시고 흉악의 결박을 끊어주시고 쇠사슬을 풀어주사 새로운 살 길을 열어주시는 긍휼하시고 자비하신 분.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하게 하시고 주린 영혼을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 그분만이 나의 소망, 나의 기쁨, 나의 반석, 나의 힘, 나의 방패, 나의 피난처, 나의 바위, 나의 영광의 칼이 되시는 분, 나 두 눈 감을 때, 이 세상 모든 것이 내 곁을 떠나고 나 홀로 고독하게 죽을 때도 끝까지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나를 받으셔서 천국까지 데려가 주실 나의 인도자, 나의 안내자, 죽음의 허무를 깨고 부활 영생의 영광으로 인도하실 나의 선한 목자 되신 구원자 하나님. 그 어떤 경우에도 나의 궁극적 관심이 되실 수밖에 없는 바로 그분,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분.....이시다.
우리가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 한 분만 진실로 만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이 세상 모든 것 다 잃어버릴지라도 하나님 한 분만 정녕 만나 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으로 만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되는 것 아닌가. 나는 비록 부족하지만 하나님은 세상 모든 것이 그분 것이니 그분과 연합하기만 하면 세상 모든 것이 내 것이 되어지는 부요한 자가 되는 것 아닌가? 나는 정말 부요한 자 아닌가?
100 가운데 98쯤 갖았다면 2 정도는 없어도 되는 것 아닌가?
너무 욕심 부리지 맙시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 항상 문제다.
지나친 것은 모자란 것만 못하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너무 많이 먹으면 배탈 나고 말지 않는가. 하늘의 것을 갖기 위해서는 세상 것을 의도적으로라도 어느 정도는 털고 내려놓아야 하지 않겠는가!
마귀라는 존재는 자기 지위를 잊고 감히 하나님의 보좌를 욕심내어 하나님께 반역함으로 거룩한 하늘에서 쫓겨난 타락한 천사다.
마귀를 따라가면 속을 뿐이다. 잘 되는 것 같아도 결국은 망한다.
원래 마귀는 속이는 자요 거짓의 아비요 살인자이기 때문이다.
설령 이 땅에서는 잘 먹고 잘 살지 몰라도 천국을 잃어버리면 다 잃어버리는 것 아닌가?
그런데 내가 유심히 세상의 삶을 관찰해보니 하나님을 공경하며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특별하신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제외하고는 대체적으로 금생(今生)과 내생(來生) 모두 잘 되고 형통하더라는 사실이다. 내생에서는 예외 없이 다 잘 된다. 그런데 금생에서 만큼은 절대적으로 꼭 그런 것은 아니더라도 그러나 통계적으로도 눈에 띄게 확인되는 바로는 복 받아 형통하고 잘 되더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럴 수밖에 없다.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오시는데 어찌 복이 시작되지 않겠는가. 만 가지 복의 근원 하나님이 오셔서 친히 인도하시고 도우시니 안 되는 것도 되고 불가능도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근본이 복과 생명이시오 불가능의 가능이시다. 만복의 근원이 되신 분께서 친히 오셔서 도우 신다 는데 무엇이 안 될 것이 있겠는가. 하나님 마음을 사고 하늘과 통하기만 하면 죽은 자도 살리시고 없는 것도 있는 것처럼 불러내시는 하나님께서 기이한 구원을 나타내보이실 것이다. 그 살아있는 증거는 하도 많아서 글로 쓰기에 불가능함으로 아예 여기서는 포기하련다.
그런데 마귀를 따라다니면 내생에서는 반드시 망하고 이 세상의 삶에서도 보면 통계적으로 만사가 불통(不通)이요 잘 안되더라는 사실이다. 당연하지 않겠는가. 마귀는 근본이 저주받게 하여 죽이는 것이 목적이다. 속이고 강탈하고 병들게 하고 파멸시키는 영적 존재다.
그러니 마귀를 만나 마귀에게 붙잡혀 종노릇 하면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다. 될 것도 안 되고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법이다.
여기서 우리의 선택은 너무나도 자명하다.
하나님이냐 마귀냐? 생명이냐 죽음이냐? 복이냐 저주냐?
너희는 살기 위해서 하나님을 택하라.
너희는 복을 얻고 생명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택하라.
무엇을 머뭇거리는가?(수24:14-25).
언제부터인가 신학에서도 ‘만남’(encounter)을 상당히 중요한 신학적 주제로 인식하게 되었다. 만남(encounter)이야말로 신학의 실마리를 푸는 열쇠가 된다는 것이다.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만나고, 생명의 말씀과 만날 때 회개를 경험하고 구원도 복도 만나게 되는 것이다(눅19:1-10).
나는 이 세상이 흑암과 곤고와 쇠사슬에 매여 칠흑같이 어둡지만 그래도 긍정해 보고 싶다. 아무리 악한 세상이라 할지라도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여지가 있기 때문이고, 좋으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만남이 되어 주시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서 지식에까지 새로워 진 사람, 영혼이 거듭나서 육적인 옛 사람이 죽고 새로운 하늘의 사람이 된 사람, 하나님의 거룩한 영으로 감동을 받은 성령의 사람은 뭇 사람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만남, 영원한 만남은 이런 것입니다’ 하고 무언의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의 모양이신 ‘예수’ 라는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으로, 다시 말하면 보이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분이 나를 위하여 대신 죽음을 죽어주셨다. 그 흘리신 보혈의 피가 마귀 권세를 물리칠 하나님의 능력이 되셨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 흘리신 하나님의 피로서 마귀를 심판하시고 우리를 마귀의 손아귀에서 빼내시어 하나님의 자녀 삼으셨다. 이 사실을 믿고 따르는 자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우리는 더 이상 마귀의 종살이 하는 어둠의 자식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빛의 자녀들이요 영광스러운 천복(天福)을 기업으로 물려받는 천국의 자녀들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은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인데, 이 비밀을 알면 알수록 우리가 누릴 복의 세계는 더 커지고 넓어질 것이다(엡4:13-15).
그러므로 우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舊習)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어야 한다(엡4:22-24).
오늘날 우리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걸핏하면 분쟁하고 갈라서고, 원수 맺고, 파리 목숨 대하듯 생명을 빼앗는 잔인하고 무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무슨 만남이든지 두려워하고 기피하는 낯설기 이를 데 없는 소외의 심연 한 가운데에 있다. 모두가 분주하지만 실상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고독하기는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이란 존재의 고독 그 자체를 피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 어디서나 진실하고 따뜻한 만남, 아름다운 만남이 그립다.
좋은 책을 만나고, 좋은 친구, 좋은 스승, 좋은 남편, 좋은 아내, 좋은 이웃을 만날 수 있기를 소원한다. 아니 설령 그런 좋은 것들을 만난다할지라도 그것만 가지고는 턱없이 부족하다. 영원하신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과 만나고, 지금 여기서 하나님으로 나타나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만날 수 있을 때만 우리의 영의 소원은 만족하게 채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세리장이 삭개오는 예수를 만나고 운명이 바뀌었다.
인생의 방황이 끝나고 새로운 복의 세계가 열리는 출발점은 영원하신 하나님, 이 세상이 좋아하는 복은 물론이고 영생의 복까지 주실 수 있는 좋으신 하나님과 만날 때 시작되기 때문이다. 할렐루야! 모든 영광 하나님께 돌려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그는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네 우편 그늘이 되신다. (시121:1,7)
*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사
주의 진실과 의로 응답 하소서 (시120:1 . 시119:170 시130:2-5)
* 마른 땅같이 주를 사모하는 내 영혼,
주의 모든 행하신 것을 묵상하며
주의 손의 행사를 생각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펴리라.(시143:6)
* 아침에 나로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시고
나의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시143:8)
* 내가 주님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위엄과
크신 은혜를 기념하여 말하고
주의 의를 노래하리라. (시145:7 출20:24 시30:4 마26:13)
* 하나님께서는 만유를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니
모든 피조물이 주께 감사하며 찬송한다.(시145:9)
* 하나님 지으신 모든 것이
주의 능하신 일과
주의 나라의 위엄의 영광을
인생들에게 웅변하고 있다. (시145:5 사2:10 벧후1:16)
수정증보 될 말숨 글(4): 이름에 대한 신앙적 성찰(省察)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가지게 된 이름은 염정하(廉貞夏)다.
지금까지 쓰고 있는 이름 ‘동권’ 보다 부르기도 편하고 예쁘다는 생각마저 든다.
지금까지도 우리 어머니께서는 여전히 ‘정하’라고 부른다. 우리 가족에게는 이름에 얽힌 사연이나 법적인 것은 별 의미가 없고 그저 있는 그대로의 처음 이름이 좋기 때문이리라.
나는 초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무려 4개의 이름을 운명적으로 가져야만 했다. 내 의지와는 전혀 상관도 없이 정하에서 동권으로 동권에서 정권으로 정권에서 다시 동권으로 옮겨졌던 것이다. 지웠던 이름을 다시 쓰다니 아마 이런 경우는 없을 것이다.
60년대만 해도 우리나라의 호적체계는 본적이 있는 큰집에서 했다.
교통통신이 오늘날처럼 발달하지 못했던 그 당시에는 고작 우편배달이 거의 전부였는데, 충청도 두메산골에 사시던 큰 아버님께서 우리 집 호적관리를 하시면서 “춘천 동생은 아마 아들 셋에 딸이 넷 일거야....” 하시면서 있지도 않은 아들 하나를 추가해 넣었다. 호적부에 있지도 않은 자식을 두면 초등 교육 통지서나 병역 고지서가 나오게 되면 난감하기 이를 데 없어진다. 고민하시던 나의 아버님은 어쩔 수 없이 내 나이 1살 위에 있는 정하를 사망신고로 없애셨다. 어린 나이에 영문도 모른 채 동권 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데 또 연락이 왔다. “춘천에 살고 있는 그 아들 녀석이 아마도 염정권이지?” 하시면서 묻지도 않고 임의로 처리해버리셨다. 할 수 없이 정권이라는 이름을 일, 이년 사용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중학교 입학시험을 얼마 앞두고 또다시 난리가 났다. “네 이름이 또 다시 동권으로 바뀌었으니 시험지에 정권으로 한번만 이라도 잘못 썼다가는 그것으로 낙방이다. 실수하지 않도록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이름쓰기 연습 많이 해라!”
우리 부모님과 담임선생님은 이 일 때문에 무척 걱정 하셨다.
이런 기막힌 사연 때문인지 나는 나의 이름에 웬지 자부심이 없고 남의 옷을 입은 것 마냥 어색함을 느낀다.
나는 최근 힐링 에너지 건강센터를 운영하시는 김 감사(金 感謝) 라는 귀한 분을 만났다. 그는 정부산하 기획재경부에서 20년 동안 경제 전문가로 일하기도 했는데 술 때문에 건강이 나빠져서 사표를 내고 기도원에 2년 동안 칩거하면서 기도하다가 특별히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다. 자기 취미생활은 술 담그는 것이었다고 한다. 외국 출장 갈 때마다 호랑이 뼈 같은 별의 별 진기한 것을 다 들여와서 술 담그기를 창고 가득 몇 백 병 만들어 보물처럼 간직할 정도였으니 알만하지 않은가.
그런데 기도하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술병을 모두 밭으로 가져가서 남김없이 다 쏟아버려라!”는 특별한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아내와 함께 차에 가득 술병을 싣고 가서 하나도 남김없이 다 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지금까지 술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한 순간 술을 딱 끊은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원래가 죄악 덩어리인데 욕심과 정욕 덩어리 자체인 사람이 자기 스스로 어떻게 새로워질 수 있단 말인가. 의지 자체가 이미 썩었는데, 썩은 데서 나오는 것은 썩은 것 이상일 수 없다. 사람은 전적으로 불가능한 존재라는 사실, 이것이 내가 깨달은 것이 요, 바로 이것이 나를 하나님 신앙으로 인도해주셨다.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님이 오셔야만 변화될 수 있고 새로워질 수 있다. 만일 그 때 하나님이 내게 오시지 않았더라면 나는 벌써 죽었을 것이다. 내가 지금 사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내가 끊임없이 새로운 놀라운 것을 발명 하고 돈을 벌고 하는 이 모든 일들은 궁극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을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귀하고 거룩하신 뜻을 위한 일이라면 나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헌신 할 생각이다 ......”
그는 한양대, 고려대 대학원, 성균관대 대학원 등에서 경영학과 컴퓨터 과학기술 등 공부를 많이 했지만 또다시 캐나다에서 국제 전문 한의사 자격증을 독학으로 취득했다. 뿐만 아니라 빛의 세계를 연구하여 전 인류에게 혜택을 가져다 줄 수 있는 독보적인 발명품들을 만들어냈는데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알려주시고 가르쳐주셨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고백한다. 그는 최근에 두레교회로 유명한 김진홍 목사의 웰빙 하우스 ‘빛의 집’을 짓기도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은 참 빛이시다. 하나님의 말씀 또한 빛이시다.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요1서 1:5).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요1:9-10).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서 치료하는 광선이 나온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4:2).
과학적인 언어로 하나님은 ‘질량 없는 에너지’ 라고 표현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빛(에너지)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초월하고, 통과하고, 도무지 막힘이 없다. 하나님이 오시면 불가능이 가능해지고 안 되는 것도 되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 앞에서는 죽음이라는 벽도 다 무너진다.
부활영생이 바로 그것을 뜻한다.
하나님이 지으신 우주만물 안에는 우리가 모르는 온갖 신비한 빛(에너지)의 세계가 존재한다. 좋은 빛, 나쁜 빛, 음과 양, 남자와 여자, 출생과 죽음, 추위와 더위, 행복과 불행.....
말하자면 깊은 땅 속을 흐르는 수맥(水脈)이 나쁜 파장을 일으켜 치명적인 암을 비롯한 각색 질병을 가져오고 건강을 무너뜨린다. 음식물이 암을 발병시키려면 몇 십 년이 걸린다면 극히 나쁜 수맥의 경우에는 단 2-3년 만에도 암을 일으켜 죽일 수 있다.
놀랍지 않은가! 그런데도 현대인들은 거의 이런 사실을 모르고 살고 있다. 수맥이 인체에 미치는 치명적인 악영향 존재여부 조차도 대부분이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 안타까운 오늘의 현실이다. 똑같은 음식이라 할지라도 사람의 체질(體質)에 따라 득이 되는 먹거리가 있는가 하면 실이 되는 먹거리가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무거나 분별없이 막 먹고 손해 보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주의 비밀은 너무도 크고 놀라워서 눈에 보이는 것만을 가지고 판단하면 크게 잘못될 수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를 알 때만이 진리로 인식할 수 있다. 하나님은 모든 것에서 최고 좋은 +30 이상이다. 나는 얼마 전 김 민선 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김 감사(金 感謝)로 개명(改名)하였다. 영적인 선택인 것이다....“
우리의 첫 만남에 적지 않은 감동을 받은 나는 집에 돌아와서 메일을 올려드렸다.
【김감사 님께. 안녕하십니까. 저는 어저께 춘천에서 뵈온 염동권 목사입니다.
선생님을 만나게 하시고 알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우리의 만남과 인연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복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지금 인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선생님을 만남으로 갑자기 생각이 바뀌었고, 새로 시작하는 교회 이름과 본인의 이름까지도 바꾸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선생님께서 큰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아래 명함에서 교회 이름과 저의 이름을 보아주시기 원합니다.
교회 명은 원래 ‘말숨 수도(修道) 교회’로 정하고 지인들에게 알렸는데 오늘 아침 ‘말씀의 빛 교회’로 하는 것이 좋겠다는 한인우 친구 선생님의 의견이 있습니다. 선생님의 의견은 어떨런지요?
특히 충청도 산골에서 사셨던 저의 큰 아버님께서 저의 호적관리를 잘못하시는 바람에 제 이름이 무려 4번이나 바뀌게 되었는데, 그것도 국민학교 시절과 중학교 들어가는 시기에 ‘염정하- 염동권- 염정권- 염동권’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지금과 전혀 행정시스템이 달랐고 큰집에서 호적관리를 했었습니다.
춘천중학교 입학시험 볼 때 염동권을 염정권으로 무의식중에 기재할까봐 우리 가족과 담임선생님이 큰 걱정까지 했습니다. 아무튼 지금까지도 정이 가지 않는 염동권 이라는 이름을 원래 이름 염정하로 바꾸고 싶습니다. 그런데 정하의 한자어가 어떤 것이 좋을지 판단이 서지 않고, 특히 정은 곧을 정(貞)을 쓸지 조정 정(廷)을 쓸지, 하는 여름 하(夏)를 쓸지 큰집 하(廈)를 쓸지도 모르겠습니다.
선생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조만간 선생님을 저희 집에 모시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에 대한 모든 정보는 말숨문서선교회에 오시면 책 10권 분량의 글이 있습니다. 헤아려 주시기 원합니다. 최근에 쓴 글 한편 '까라마조프 가(家)의 형제들에 나타난 말숨 영성' 이라는 글 올려드립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염동권 목사 올림.】
김감사 원장님은 밤늦게 답신을 주셨는데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성명은 염 소망(+25), 교회 이름은 ’말씀의 빛 교회(+25)‘ 로 하시면 아주 좋은 것 같습니다. 에너지 종류에는 좋은 에너지 0에서 최대 +30, 나쁜 에너지 0에서 최대 -30입니다. 에너지는 소리 이고, 파동이기 때문에 뜻은 따지지 않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시려면 아브라함, 사라, 바울처럼 옛날이름에 연연하시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동안 사모님에게 고생을 너무 많이 시켜드리셨네요.
새로운 피조물 이후에는 항상 사모님의 결정을 우선하시기 바랍니다.
사모님이 안계시면 목회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사모님은 항상 목사님을 위해서 기도하시는 분이지요. 옛 말에도 부인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을 얻어먹는다고 했죠. 이제는 목사님의 모든 것을 내려놓으시고 사모님과 주변의 기도하는 분들의 의견에 동참하시면 어떨까요. 감사합니다. 힐링 에너지 김감사(구명: 김민선)원장.】
나는 아내와 심도 있는 대화 끝에 이번만큼은 아내의 의견에 따르고자 결심하고 있던 터 였는데 위의 글을 받고 다음과 같은 답신을 드렸다.
【네.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잘 알겠습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저의 아내가 저를 살리는 소망을 가지고 기도했기 때문에 지금 제가 살아있습니다. 제 아내가 원장님이 주신 이름을 보고 강력하게 ‘염 소망(所望)’ 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라고 주장했고, 교회 이름도 ‘말씀의 빛 교회’로 바꾸라고 권면합니다.
‘말숨’은 일일이 설명해야만 알아듣기 때문에 적합지 않고 수도(修道) 라는 말도 중세 카톨릭을 연상케 됨으로 거부감이 듭니다.
하나님 말씀에서 생명을 살리는 빛이 나오는 것이니 ‘말씀의 빛 교회’로 바꾸세요.....
저도 이번만은 아내의 말을 듣겠다고 결심하고 있던 차에 원장님의 답신을 받게 되어 마음에 확신이 더욱 생깁니다. 하나님께만 소망을 가지고 뜻과 힘과 성품과 정성을 다하여 예수님을 섬기겠습니다. 제 아내가 늘 하는 말이 아내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기는 법인데 당신은 말을 듣지 않아 생고생 이오 라고 거듭거듭 말해왔습니다.
진심으로 반성하며 이제부터는 전적으로 새로워지겠습니다.
딱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막혔던 그 무엇이 뻥 뚫리는 듯 마음이 후련하며 기쁩니다. 감사합니다. 받은바 은혜에 보답하도록 힘쓰겠습니다.
많은 지도편달 바라오며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저의 아내와 조만간 인사드리고 싶습니다. 늦은 밤 은안 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경솔했던 저를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고 위하여 기도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저희 새로 시작하는 교회는 ‘말씀의 빛 교회’입니다.
그리고 저는 염소망 목사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오늘 의정부 지방법원에 개명신청서를 냈습니다.
하나님만 소망하고 천국만 소망하고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려고 하는 목사 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사랑합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 하나님은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시는 자비하신
영의 아버지시다(살후2:16; 롬15:13; 골1:5).
* 하나님이 그대에게 평강 주시기를!
여호와의 자비하신 얼굴을 네게 비추사
그대를 지키시고 삶과 복을 얻기를(민 6:24-27)!
* 오늘날 내게 명하시는 여호와의 명령을 청종하고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사랑하고 섬긴다면
하나님 영광을 볼 것이다(신 4:29).
*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업 위에
그의 영광과 아름다움이 있기를!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사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기를
(신 11:14, 28:12; 약 5:18)!
* 좋은 것은 누구나 받아들이게 마련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이상적인 하나님 나라의 삶을 지금 여기서 보여주어서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눈으로 확인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구원에 이르게 하라는 것이다(마 5:13-16; 롬 13:8-14).
*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행사에 은혜로우시다.
때를 따라 식물을 주시고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케 하신다. (시1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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