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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이성주 목사님과 진광교회 성도님들께.
안녕하십니까.
호산나교회 염동권 목사입니다.
산수유가 꽃망울 터뜨리는 것을 보니 벌써 봄이 왔습니다.
심장 수술 후 모두가 기도해 주셔서 몸이 많이 회복되고 있습니다.
일전에 진광교회 게스트 룸에서 편히 쉬고 새벽기도회에 갔다가
목사님의 새벽설교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열 한 제자들은 예수님을 “주여 나는 아니지요?”했던 반면에
주님을 배반한 가롯 유다는 예수를 주님이라 고백한 적이 단 한번도 없고,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했다는 그 말씀, 주님과 랍비의 차이를 너무도 잘
알아듣기 쉽게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날 집에 와서 이 말씀을 다시금 음미하며 글로 남기고 싶어서 글 한편 썼습니다. ‘주여,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라는 글은 말숨 산문집 제 7권의 대미(大尾)를 장식하는 글로 쿰란 출판사에 사정해서 추가원고로 넣었습니다.
이모저모로 목사님께 감사합니다.
진광교회 성도님들 모두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뜨겁게 고백하면서
복되고 아름다운 성전 건축을 소리도 없이 이루어 하나님께 영광 돌려 드리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모신 성전건축 사역에 동참하시는 모든 분들께 한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넘치시기를 기원합니다.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넘치도록 채워주실 것입니다.
크신 일을 시작하신 목사님께 은혜 있으시길 기도합니다.
말숨 산문집 제7권 ‘그대 안해(安偕), 나의 어여쁜 신부여’는
1차 교정 중에 있습니다. 출판비가 마련되면 즉시 출간될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제1권 ‘한 입 가득 베어 문 레마’처럼 특별히 기념비적으로 독자들의 헌신에 의하여 출간되기를 원하여 뜻을 세우고 진행 중에 있습니다.
저는 진광교회에 특별한 사랑과 은총을 받았고 앞으로도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싶습니다. 저의 아들 염의섭 전도사를 진광 교회에서 목회실습 하도록 이끌어 주시고, 온 성도가 말숨 산문집에 관심을 갖고 필독서로 읽고 후원해주신 교회도 흔치 않기 때문에 마음이 더 가는 것 같습니다.
제 7권이 나오면 먼저 진광교회 모든 성도님들 가정에 1권씩 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책 출간 비용이 대략 1200 만 원 정도 인데, 절반가량이 모금되었습니다. 500-600 성도님들이 만원 예약 구매헌금에 동참해 주시면 은혜 가운데 이 작은 소원이 이루어져 새로운 간증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조만간 목사님과 진광교회 성도님들을 만나 뵙고 싶습니다. 기도해 주시기 원합니다. 감사합니다.
2013. 3.21 호산나교회 염동권 목사 올림.
주님이여,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아유, 내가 미쳤나봐! 정신머리 좀 봐. 어쩌다 이런 일을 저질렀지?
내가 나도 모르겠으니 이를 어쩜 좋아. 이제 어쩌면 좋지?”하면서 탄식하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보았을 것이다. 그렇다. 그것이 인간이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있다.
우리는 종종 사람 마음을 다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사람 마음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다면 얼마나 편리하고 능률적이며 인간관계에서도 명쾌해지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사업을 하건 무엇을 하건 백전백승할 것만 같다. 물론 그런 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면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곧 알게 된다.
차라리 사람 마음을 모르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서로의 마음을 모르게 감추어 두셨다.
심지어는 자기가 자기 마음을 모르도록까지 하셨는지도 모른다.
자기가 자기를 모르면서도 가장 잘 안다는 착각 속에서 살도록 지음 받은 존재, 그것이 사람이다. 그래서 인간은 복잡 미묘한 존재다.
언젠가 평소 아무 일 없이 무난히 밝게 사셨고, 교회에도 잘 다니셨고 교우들과의 관계도 원만했던 어느 부장판사가 우울증을 앓다가 돌연 자살을 해서 우리를 안타깝게 했던 일이 있었다. 특히 그는 교회를 다니던 신자였다는 점이 두고두고 마음에 걸린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양식 있는 부장 판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는 교회 게시판에도 글을 올린 적이 있는데, 판사라는 직업은 “참으로 한심하고 끔찍한 의심하는 직업\' 이라고 말하면서, 의심과 마음의 저울이 사회생활에서, 대인관계에서, 가족관계에서도 드러나고 심지어 아내와 부모님 말마저 의심하게 한다\"고 토로한 바 있다. 뿐만 아니라“재판에 있어서 진실을 아는 사람은 판사가 아니라 당사자 본인들인데 자신들이 가장 잘 알면서 왜 판사에게 판단해 달라고 하는지 한심한 생각이 든다”는 뼈있는 말도 했다.
나는 그의 이 말을 “자기가 자기 자신도 잘 알지 못하여 답답해 죽겠는데 하물며 내가 어떻게 남을 판단할 수 있겠느냐”는 말로 들려진다.
그만큼 복잡 미묘한 인간 존재의 갈등이 그를 죽음으로까지 몰아넣은 것이 아닌가 한다.
아무튼 만일 우리가 하나님처럼 서로 상대방 마음을 훤히 꿰뚫어 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한자리에 모여 함께 예배드리는 것도 어렵고, 부부가 함께 살 수 있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한 두 끼 함께 밥을 먹을 수는 있겠지만 지속적으로 만나 같이 밥 먹고 함께 삶을 나눌 수 있는 공동체 생활은 더욱 불가능할 것이다. 순간순간 마음속을 스쳐지나가는 마음의 변화를 다 읽고 알 수 있다면 서로의 관계를 유지하고 용납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없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놀랍게도 우리 마음을 다 아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심령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 숨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있는 그대로 다 드러나게 되어있다(대상29:17, 시7:9, 살전2:4).
예수님은 자기를 배신하고 팔아넘길 가롯 유다를 다 아시면서도 끝까지 사랑으로 품으시고 친구로 대접하셨다. 이는 실로 겉 다르고 속 다른 우리 사람과는 근본이 다른 엄청난 놀라운 얘기다.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데 어떻게 끝까지 사랑으로 품어주실 수 있었을까?
그것은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하나님으로 오신 생명의 참 떡, 곧 하늘에서 내려온 인자(人子)이셨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호언장담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다니요.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다 주님을 부인하고 떠날지라도 나는 끝까지 주님을 따를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십자가 처형 현장에서 새벽닭이 울기 전에 주님을 세 번 부인,
저주하기까지 했고 주님의 예언의 말씀이 응한 것을 알고는 심히 통곡했다.
그 누구보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자부했고 끝까지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다고 장담했던 그였는데 여전히 죽음 앞에서는 두려워 떨었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를 비겁하게 속이고 주님을 저주하면서까지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자신의 이중적인 모습에 괴로워 통곡했다.
열 한 제자나 가롯 유다나 다 배신자라는 점에서는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성경 말씀을 자세히 보면 다른 것이 한 가지 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을 하나님의 때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 제자들과 유월절 최후 식사 하시는 자리를 마련하셨다. 그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대화를 하고 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마26:22-25).
여기 보면 가롯 유다를 제외한 열 한 제자들은 모두 근심하며 말한다.
“주여 나는 아니지요....”
본시 사람은 자기가 자기를 모르는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두려운 마음으로 “주님 혹시 나는 아니지요?”라고 되묻는 것이다.
열 한 제자는 예수님을 ‘주님이여’라고 고백했고, 그래서 회개하고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가롯 유다는 예수를 절대로 주님이라고 고백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는 항상 예수를 주님으로 생각지 않고 선생님으로 보았고, 그래서 최고의 존칭어 ‘랍비여!(선생)’ 라고 불렀다.
“랍비여! 선생님을 팔자가 나는 아니지요?”
대제사장들과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예수를 잡으러 왔을 때도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었다(마26:49).
언제나 예수님을 랍비라고 생각했던 가롯 유다는 예수님에 대한 자기 기대치가 깨지자 배신했고, 자기 자신을 후회하고 자책한 나머지 자기 의로움을 나타내는 자살을 선택했다. 자살로 죽을지언정 예수께 회개하고 돌아오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믿는 것과 훌륭한 선생님 혹은 위대한 현인(賢人) 정도로 알고 따르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따르느냐 아니면 랍비(선생님) 정도로 알고 따르느냐 하는 것은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전혀 다른 결과, 다른 운명을 가져온다.
예수를 나의 주님으로, 내 대신 채찍에 맞으시고 죽음을 맛보시고 다시 부활하신 주님으로 알고 믿고 체험하고 따를 수 있어야 회개도 있을 수 있고 구원도 있다. 거기에는 성령의 능력도 있고 새로운 변화도 있고 영광의 미래도 있다. 그러나 예수를 랍비 정도로 알 때에는 전혀 무능력하고 회개도 없고 미래도 없다. 영적인 능력이 도무지 없고 죄 사함의 은혜나 천국의 소망도 없다. 정말 하늘과 땅의 차이 아닌가!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자기 자신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복잡 미묘한 존재다.
그래서 어느 한 순간에 넘어질 수 있고 잘못할 수도 있는 존재다.
누가 지금 여기서 자신의 구원을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섰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경고했다(고전10:12).
끝까지 구원을 붙들고 이루어 가라고도 말씀하셨다.
우리는 항상 겸손하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천국에 이를 때까지 구원을 이루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빌2:12).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그 어떤 사람도 하나님께 은혜로 구원을 약속받았을 뿐이다. 아직은 아닌 것이다. 어느 누구도 아직은 구원을 받았다거나 구원이 완성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끝까지 붙잡아야만 한다.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9:27) 고백했다.
예수님은 내 대신 나의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고 믿고 따를 수 있을 때에만 회개도 가능하고 영적인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될 수도 있다.
*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말씀으로 지으셨다.
또한 진리의 말씀으로 나를 낳으셨으니
의심할 나위 없이 그분은 나의 영원하신 아버지시다(창1:1-2 약1:18).
* 내일도 해가 뜬다. 전혀 의심되지 않는다.
이에 대한 풍부한 경험과 사실에 대한 완벽한 신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으로 나를 낳으신
영원하신 아버지이시다(약1:18 요17:5).
* ‘내일은 해가 뜰지도 모른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그는 정신장애에 가까운 사람일 것이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라고 고백하지 못한다면
이 또한 중병에 걸린 상태다(고후1:3 롬8:15).
* 여호와는 내가 만난 나의 하나님이시다.
나를 건지시고 고쳐주시고 살려주시고
바른길로 걷게 하신 나의 하나님이시다(시51:14 54:7 시91:3,14).
* 때가 차매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셔서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나셔서
하늘 보좌 우편에 오르신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히1:2-3)
◆ 저는 신앙의 여정 가운데 특별한 의미의 삶과 죽음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어느 교회이든 제게 간증 설교할 기회를
주시면 기꺼이 제 자신을 헌신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말숨\' 산문집 1권을 구매해 주시면 1권이 사랑의 선물로
전국 교도소에 님의 이름으로 기증됩니다.
(각권 13,000-15,000원. 전6권. 농협:301037-51-098385.
호산나교회 010-9059-4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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