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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동권 목사님께.
'고난의 신비는 하나님의 지혜' 라는 보내주신 말숨 글을 읽고 또 읽고 은혜 많이 받았읍니다.
바쁘신중에도 기억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주신 책은 정독 하느라 많은 양을 읽진
못했으나 기도하며 한페지 한페지 넘기고 있읍니다 더위에 건강을 위애 기도 드리겠읍니다. 진광교회
이재준 집사 올림.
* 진광교회 성도님들께:
이재준 집사님께서 두번째 메일 답신을 보내오셨습니다.
집사님은 인생의 어느 특정한 한 시점에서 예기치 않은 불행한 사고를 당하시어 오랜 세월 고통을 받아오시고 마음에 응어리진 아픔과 풀지 않으면 안되는 수수께끼 같은 문제 앞에서 지금도 하나님 앞에서 고난의 문제와 씨름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제게 보내오신 이메일 주소를 통하여 몇 편의 고난의 문제를 다룬 글을 보내드렸는데, 말숨 글을 통하여 영적인 소통이 우리에게 피차 위로를 주며 격려와 힘을 주고 하나님 나라 사귐과 친교가 더욱 가까와지는 것 같아 기쁘고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살아있는 구체적인 성도의 교제라는 것이 이런 것 아닐까 합니다. 제가 진광교회를 섬기면서 이렇게 살고 싶습니다. 그저 일주일에 한번씩 예배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말숨 글을 통한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 전도의 일이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려는 단 하나의 목적으로 쓰여진 말숨 산문집이 진광교회 성도님들의 귀한 손길을 통해서 전도의 일에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제가 성도님들에게 메일 주소를 받고자 하는 까닭은 이와같이 서로 말숨 글을 통해서 믿음을 나누고, 이것이 사랑하는 이웃을 전도하는 계기가 되고자 하는 소원 때문입니다.
진광교회 성도님들께서 많이 기도해주시고 이메일을 활용해주시고 기존의 출판된 말숨산문집을 개인의 신앙 향상과 이웃 전도에도 적극적으로 많이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십시오. 염동권 목사 올림.
--------- 원본 메일
---------
보낸사람: "염동권"
받는사람 : "이재준진광"
날짜: 2014년 7월 16일 수요일, 21시 07분 47초
+0900
제목: 고난의 신비는 하나님의 지혜
고난의 신비는 하나님의 지혜
얼마
전 공적인 신앙 모임에서 어느 분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곤혹스러운 얘기를 들었다. “평소 교회를 잘 다니던 내 친구가 요즘 교회에 발을 끊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내가 잘 아는 좋은 교회가 있으니 함께 가자고 했더니 자기는 교회 다닐 필요를 더 이상 느낄 수 없어서 포기하겠다고 한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그의 말은 아예 내 입을 얼어붙게 할 정도로 곤혹스러운 것이었다. “나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교회 다녔고 기도했고 하나님
일이라면 헌신도 많이 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내가 하는 일은 제대로 되는 구석이 한 가지도 없다. 내 친구들은 나만큼 진실하게 열심히
사는 것 같지도 않은데 어째서 그들은 하는 일마다 잘 되고 나는 이렇게 쪼그라들기만 하고 어려움만 당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몰라서 고통스럽다.
나는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하나님께 아무리 기도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으니 이제는 더 이상 지쳐서 교회 다닐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겠다...”
사실
이와 같은 신앙적 회의감은 인생 살다보면
한 번쯤은 흔히 갖게 되는 일이다. 또한 여기에 대한 마땅한 대답을 얻지 못하여 중도에 신앙을 떠나고 포기 한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이 세상
삶에 얼마나 지쳤으면 천국까지도 약속하는 구원의 소망마저 포기한단 말인가!
나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의외로 그런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신앙의 목적을 세속적인 기복(祈福) 차원에 두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니 논할
가치가 처음부터 없는 것이라고 쉽게 정죄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런 문제는 그렇게 단순히 말 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
구약성경
‘욥기’라는 책은 온통 이런 문제를 다룬 최고의 탁월한 지혜서다. 욥기에는 ‘의인(義人)의 고난’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 나온다.
동방의
의인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로서 하나님도 인정했던 당대에 가장 훌륭하고 큰 사람이었다.
사탄은
여호와께 말하기를 “어찌 욥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시고,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라.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면 틀림없이 주를 욕하지 않겠나이까.“
그때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의 생명을 해할 권세만 제외하고 욥을 시험(유혹)할 모든 권리를 주셨다. 우리는 사탄의 시험조차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되어 진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욥은
갑자기 사탄에게 불같은 시험을 당했다. 하루아침에 모든 재산을 다 잃어버렸고, 자식들도 천재지변으로 목숨을 잃었고, 마누라는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버리라고 비난 했고, 자신의 몸뚱이는 온몸에 악창이 나서 너무 괴로워 죽기를 구하는 파탄 지경이 되었다.
그때
욥의 세 친구들이 멀리서 소문을 듣고 위로하고자 찾아왔으나 욥이 처한 형편지경을 보고는 정작 위로하기는커녕 오히려 마음을 찌르고 파고드는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회개를 촉구하기만 했다.
욥이
지금 이 지경이 된 것은 반드시 여호와 앞에 숨겨진 죄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극심한 고난 가운데 코너에 몰린 욥을 위로하기 보다는
더욱 궁지에 몰아넣고 말았다. 아무 까닭 없이 의인은 고난 받을 수 없는 것이니 네가 살려면 지금이라도 회개하라고만 했다.
철저한
인과응보(因果應報)를 들고 나온 것이다.
동방의
의인이었던 욥은 쉽게 수긍할 수 없어 항변(抗辯)했다.
그러나
세 친구 가운데 데만 사람 ‘엘리바스’는 이렇게 주장한다.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나니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기근 때에 죽음에서, 전쟁
때에 칼의 위협에서 너를 구원하실 터인즉 네가 혀의 채찍을 피하여 숨을 수가 있고 멸망이 올 때에도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너는
멸망과 기근을 비웃으며 들짐승을 두려워하지 말라. 들에 있는 돌이 너와 언약을 맺겠고 들짐승이 너와 화목하게 살 것이니라. 네가 네 장막의
평안함을 알고 네 우리를 살펴도 잃은 것이 없을 것이며 네 자손이 많아지며 네 후손이 땅의 풀과 같이 될 줄을 네가 알 것이라. 네가 장수하다가
무덤에 이르리니 마치 곡식 단을 제 때에 들어 올림 같으니라. 볼지어다. 우리가
연구한 바가 이와 같으니 너는 들어 보라. 그러면 네가 알리라(욥5:17-27)."
사실
이런 주장은 신명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보편적인 영적원리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과 같은 것이다. 욥의 친구들의 주장은 일견 어느 일면은 정확하게
맞는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다. 사람이
판단하고 말할 수 있는 지혜의 한계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람은
결코 알 수 없는 또 다른 측면, 그러니까 하나님만이 판단하고 말할 수 있는 하나님의 지혜라는 숨겨진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고난에
대한 해석은 단순하지가 않다는 점에서 어려움이 있다.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의 원인은 일반적으로 죄의 결과로 해석된다.
대부분의
경우에 맞는 말이다.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과 소통이 막히면 형통하지 못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고 있는 으뜸가는
주제다.
그러나
모든 고난이 죄 때문이라는 주장은 한편으로는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하나님의 깊은 뜻을 이루는 고난도 있고, 하나님의 섭리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고난을 주시고 고난이라는 수단을 사용하시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판단하실 수 있고 말씀하실 수 있는 또
다른 차원의 영역이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까닭 없는 고난은 없다고 믿는 것이 신앙이다. 고난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내가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이 내게 무슨 이유가 있는가를 찾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징계이든 특별한 목적과 섭리를 이루는 고난이든 내가 발견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고요한
바다로’라는 찬송이 있다(찬373).
고요한
바다로 저 천국 향할 때 / 주 내게 순풍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풍랑과
큰 물결은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을 뜻하지만 참으로 묘한 것은 그 때문에 천국 항해가 더 빨리 가게 된다는 심오한 뜻이 담겨있다.
바람에
의지하여 가는 돛단배는 바람이 없으면 갈 수가 없지 않은가.
가정이나
교회에 그 어떤 문제나 어려움이 없으면 좀처럼 기도하지 않는다. 그것이 사람의 특징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자식이 아프고 미래가 막힌다든지 하면 견디지 못하고 하나님을 찾는다. 말하자면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서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기
때문이라’는 시편기자의 고백은 위대하고 성숙한 신앙이다(시119:71).
따라서
고난당하고
있는 사람에게 함부로 인과응보의 말씀을 빗대어 훈계하듯이 말하면 위로와 힘이 되어주는 것이 아니라 심적인 괴로움을 더해주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욥의
치열한 논쟁은 오직 하나님 스스로가 나타나셔서 말씀하기 전까지는 끝날 줄을 모른다. 저마다 자기주장이 옳다고만 할 뿐이다.
이것이
사람이 가진 지혜의 한계가 아닌가 한다.
모든
논쟁을 종식시키는 클라이막스는 폭풍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 창조의 신성(神性)한 권위 앞에서 사람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세상이 복잡하고, 내가 경험하는 일들이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어 괴로울지라도 하나님 현존 앞에 나를 대면(對面) 하기만 하면
즉시로 입을 다물게 되고, 궁극적으로 선하신 그 분의 판단에 모든 것을 맡기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사람은 본질에 있어서 수준이 매우
다르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사람은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신앙고백 할 수 있을 때만 그 분과의 관계가 열리고, 그 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되고, 그 분의 뜻을 분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도무지 풀 수 없을 것 같은 논쟁 한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은 누구신가?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모든 것에 대해서 ‘명령권자(命令權者)’이신 주권자(主權者)이시다(욥38:2- 36 요약).
“무식한
말로 나의 뜻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허리띠를 동여매고 대장부처럼 일어나서 묻는 말에 대답하라. 내가 땅의 기초를 세울 때 너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느냐? 네가 그렇게 많이 알거든 대답하라. 누가
그 수치들을 재고 줄자를 대어 보았느냐? 땅의 기초를 무엇으로 단단히 고정시켰는지,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는지 아느냐? 그 때에 새벽 별들이
노래하였고, 모든 천사들이 흥에 겨워 소리를 질렀다. 바닷물이 태를 열고 나오는 아기처럼 넘쳐흐를 때, 바다가 넘치지 못하도록 ` 한계를 정해
놓은 자가 누구냐? 그 때 나는 구름으로 바다를 덮고 짙은 어둠으로 그것을 둘러쌌으며, 바다에 경계를 지었고 그것에 문빗장과 문을 달았다.
그
때 나는 바다를 향하여, ‘너는 여기까지만 오고, 더 이상 넘치지 마라! 너 교만한 파도야, 멈추어라!’ 하고 명령했다. 네가 태어난 이후부터
한 번이라도 아침에게 명령하여, 동을 트게 한 적이 있었느냐? 그래서 새벽이 땅의 끝까지 빛을 비추어 악을 행하는 자를 멈추게 한 적이 있느냐?
누가 폭우의 길들을 내었느냐? 천둥의 길을 누가 마련했는지 너는 아느냐? 사람의
흔적이 없는 곳, 아무도 없는 사막에 비를 내리고, 더없이 메마른 땅에 물을 대고, 그 곳에 싹을 돋게 하는 이가 누구인가? 비를 낳은 아버지가
있느냐? 이슬방울은 누가 낳았느냐? 얼음은 누구에게서 나왔으며 하늘의 서리는 어디에서 태어났느냐? 물을 돌처럼 단단하게 얼리고, 물의 표면을
꽁꽁 얼게 하는 이가 누구인지 아느냐? 너는 묘성을 한데 묶고, 오리온 별자리의 고리를 풀 수 있느냐? 네가 별 무리를 계절에 따라 이끌어
내고, 큰곰자리, 작은곰자리 별 무리를 인도할 수 있느냐? 네가 천체의 운행 법칙을 아느냐? 네가 땅의 자연 법칙을 세웠느냐? 구름에게 소리를
질러, 물이 네게 홍수처럼 덮이게 할 수 있느냐? 네가 번개에게 ‘번쩍거리며 나가라!’고 명하면, 그것이 ‘예, 그대로 하겠습니다’ 라고
답하느냐?
누가
가슴에 지혜를 주고, 마음에 총명을 주었더냐?‘
욥은
위의 질문에 감히 한마디도 답변하지 못하고 이렇게 말한다.
“주께서는
무슨 일이든지 하실 수 있기 때문에 아무도 주님의 뜻을 방해할 수 없는 줄 압니다. ‘무식한 말로 내 뜻을 가리는 자가 누구냐?’라고
물으셨지요? 정말 저는 알지도 못하면서 말하였고, 깨닫지 못하는 일들을 아는 체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내가 묻겠으니
너는 대답하여라’고 하셨지요? 주님에 대하여 귀로 듣기만 했는데, 이제 저는 주를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이제 제 자신을 경멸합니다. 그리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합니다”
(욥42:2-6).
‘바실레아
슈링크’라는 위대한 영성가가 있다. 그녀는 ‘고난의 신비’를 알고자 평생을 하나님께 헌신했다. 그녀는 1904년 독일 다름슈타트에서 출생하여
1939년 함부르크 대학에서 심리학 박사를 받은 후, 교수가 되는 길을 택하지 않고 <마리아 자매회(The Evangelical
Sisterhood of Mary)>라는 선교 공동체를 만들어서 우리시대의 가장 중요한 예언자들 중 하나가 되었다. 철저한 회개를
촉구하고, 하늘나라의 기쁜 메세지를 선포하는 마리아 자매회는 독일 복음주의 루터 교회에 속한 초교파적인 개신교 여성 독신 공동체로서, 하나님이
약속으로 주신 25에이커에 이르는 토지를 믿음으로 취득하고 개간하는 노력을 한 끝에 가나안 땅을 일궈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었다.
그녀는
예수님의 고난을 평생 묵상하며 그 고난에 적극 동참하여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아픈 마음과 고통을 함께 나누고자 했던 기도의 사람으로서 복음
증거 사역과 함께 공동체 삶 속에서 침묵기도, 묵상기도, 고백 등을 통해 성령님의 내적인 영성을 조화롭게 배우는 균형 잡힌 영성을
추구하였다.
사람은
때로는 위로받기를 원하고, 함께 아파하고 슬퍼하며 공감하면서 손 한번 따뜻하게 잡아주는 것이 더 큰 위로와 힘이 되어줄 때가 있다.
삶의
시련 한가운데 지치고 낙심한 수많은 영혼들이 우리 옆에는 수없이 많다. 그들에게 고난의 신비를 알게 하고 깨닫게 해서 하나님께 위로받고 용기를
얻게 해서 끝까지 천국을 향한 항해를 잘 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할 것이다.
*
차라리 가난한 자, 소외된 자를 대접하라.
그러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라.
이는
의인들의 부활 때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따라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치 말아야 한다(마6:1 눅14:14).
*
good은 god에서 good morning은 god morning에서
good
bye는 god by에서 파생된 듯하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무엇이든지 좋아지게 되어있다
(창50:20
시107:1-9 ,30-43).
*
하나님이 우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하고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기를 기도하자(살후1:11).
*
어떤 행동을 바꾸려고 시도하기 전에
마음부터
먼저 바꾸어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면 안 될 일도 되게 하고
어려운
일도 쉽게 만든다(빌4:13 신10:16 출31:6).
*
열정은 모든 창조의 에너지다.
열심을
가지지 않고 이룩된 큰일은 세상에 하나도 없다.
세상
창조물을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은
대단하며
한 치의 오차도 없다(시121:3 시1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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