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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은 말숨 산문집 제 1권에 수록된 ‘특별한 기쁨, 특별한 행복’이라는 글에 세월이 흐르면서 몇 번에 걸쳐서 쓰여 진 글을 하나로 묶은 것이다. 특히 ‘장가가는 아들 의섭아. 너를 축복한다’라는 글은 최근 쓰여진 글이다.)
1. 특별한 기쁨, 특별한 행복......
우리나라에 복음이 전파되던 초창기에는 복음 사역자들의 때 묻지 않은 순수한 헌신과 뜨거운 열정이 그 어느 때보다 컸다고 생각된다. 1960~1970년대만 해도 그런 아름다운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오늘날 기독교의 큰 부흥은 그들의 헌신으로 이뤄진 것이다.
지금 우리 기독교계에서 크고 귀하게 쓰임 받고 계신 목사님 가운데서 내가 특별히 존경하는 어느 목사님이 계신다.
그분이 하나님께 본격적으로 부름받기 전에, 그가 하나님 은혜를 체험하고 성직자가 되었던 얘기 한 가지를 소개할까 한다. 그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농고를 졸업한 후에 뚜렷한 삶의 목표를 정하지도 못한 채 청년시절을 맞았다.
그런데 그의 인생에 큰 복이 되는 사건이 생겼다.
예수를 믿고 성령체험을 한 것이 그것이다. 하나님께 은혜 받은 그가 매일매일 하는 일은 성경 읽고 기도하는 일이었다. 청년시절에 성경을 무려 75번이나 통독했다.
하나님 말씀이 너무나 감격스러울 정도로 좋았기 때문이고, 성령으로 하나님을 만난 자신의 체험이 성경 말씀 속에 나타난 하나님과 너무나 똑같다는 사실에 놀랐기 때문이다.
은혜를 받은 후에도 그는 감히 성직자가 되고자 하는 생각은 꿈에도 해 보지를 않았다. 시골 교회에서 청년 집사로 봉사하며 순수하게 영혼을 사랑하고 전도할 뿐이었다.
교회 전도사님도 그 청년을 신뢰했고, 교인 중에 병든 자가 있으면 함께 심방하여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할 정도였다.
그가 기도하러 산에 올라갔다 하산하던 어느 날, 전도사님이 특별히 가주어야 할 병자가 있다고 함께 가자는 제의를 했다.
쾌히 받아들인 그는 초라하고 어두운 구석방에 환자가 누워 있는 집에 전도사님을 따라갔다. 그가 방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중병으로 누워 꼼짝도 못 하던 환자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내 병이 떠났다!”라고 외쳤다. 모두가 놀랐다. 같이 갔던 일행은 자리에 앉지도 않았고 기도도 드리기 전이었다. 그 사람의 말인즉 그가 방안에 들어서는 순간 자기 곁에 항상 누군가가 누워 있는 것 같았는데, 그것이 자기를 쳐다보더니 깜짝 놀라면서 문 밖으로 달아났다는 것이다.
그러자 모든 병이 한순간에 떠나고 깨끗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자,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병든 자들의 집에서 초청이 잇달았다. 치유의 이적과 기사가 연달아 나타났다. 그는 매일 전도하느라고 아침에 나가면 저녁 늦게서야 집에 돌아왔다. 주일에는 교회 봉사에 전념하였다.
청년회원과 주일학교 학생들도 갑자기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병 고침을 받은 이들이 계속적으로 몰려와 교회는 성장하기 시작했다. 성령에 대하여 일찍이 들어 본 적도 없었던 교회 안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고, 새벽기도 하는 이들이 점점 불어났다. 그때 그는 평신도였기에 누구에게나‘김 선생’으로 통했다. 가정예배와 구역예배에 강사로 초청됐는데, 그럴 때마다 성령의 역사가 어찌나 크게 일어나는지, 마치 초대 교회를 방불케 했다.
집에서 12Km쯤 떨어진 곳에서 여전도사가 집회를 인도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교회 청년들과 함께 매일 저녁 24Km를 걸어 다니며 집회에 참석했다. 사람은 매우 적게 참석했지만 그들은 매일 왕복 60리를 걸어 다니며 집회에 참석할 정도로 은혜를 목말라하며 사모했다. 마지막 날 저녁 집회 후에 여 전도사님이 내일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는 자들에게 안수기도를 해 달라고 청원해 왔다. 그는 그날 밤 밖에 나가 나무 아래에서 밤새워 기도를 드린 다음, 전도사님 부탁대로 함께 기도를 해 주었다. 그러고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는데, 환상이 보였다. “주님은 나를 맑은 물이 흐르는 곳으로 인도하셨다. 그리고 큰 그물을 손에 쥐어 주셨다. 나는 그물을 들고 가슴까지 차오르는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 급히 흘러가는 물속으로 그물을 던졌다. 그 큰 그물 속에 세 번이나 은빛 나는 고기들이 가득가득 채워졌다. 그러고는 물 위로 올라오라 하시기로 올라왔다.” 그는 그날 길을 걸어가다 신기한 음성을 들었다. “ 나귀야!” 그는 두 번째 그 소리를 듣고는 땅에 꿇어 앉아 잠시 기도를 드렸다. 그러면서 그는 좀 섭섭한 생각도 들었다. 기왕이면 “엘리아야!” 하시지 않고 왜 하필이면 “나귀야!”라고 하셨을까. 그러나 문득 주님께서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일이 생각나서 감사했다.
그때로부터 그는 나귀가 되기로 작정했다.
“주님을 태운 나귀, 모든 영광은 주님께만 돌리는, 오직 주님만을 등에 태운 나귀가 되리라!”
그래서 즉시 개울가에 가서 밤 같은 자갈을 주워 입에 물었다. 그때부터 그는 7개월 동안 항상 돌을 입에 물고 다녔다.
그는 자기 평생에 나귀처럼 입에 재갈 물고 남의 말을 하지 않고 오직 병자를 위하여 기도하며 살기로 작정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감리교단에서 폐 교회가 된 어느 시골 교회를 맡아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여러 목회자가 목회에 실패하고 떠나자 골머리를 앓던 감리교단은 폐 교회 수순을 밟던 중 그에게 한번 맡겨 보자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그는 반강제적으로 떠밀려서 설교자로 부름을 받게 되었다. 이것이 그가 목회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였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사람이 그리운 시대를 살아간다. 먹고 사는 직업으로서의 성직(聖職)이 아니라 성령으로 부름 받은 소명(召命)으로서의 성직이 그 어느 때보다 그립다. 올해 성탄절은 특별한 기쁨이 있을 듯싶다.
군에 갔던 아들이 성탄 전날 제대를 하고, 아들과 함께 성탄 예배를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군 복무를 잘할 수 있도록 은혜로 지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아들은 하나님께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카투사(KATUSA)에서 군 생활을 하면서 돈 주고도 배우기 쉽지 않은 이국문화(異國文化)를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력만 있다고 카투사 가는 것이 아니다. 아들 주변에 여러 사람이 제 1차 카투사 지원 자격시험에 합격하여 응시했지만 모두가 최종 전자추첨에서는 하나 같이 낙방한 것을 볼 때, 그것은 특별한 하나님의 배려가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아들이 군 생활하는 동안 최고의 모범적인 리더로 인정받고 제대하도록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나는 군 생활에 대한 추억이 별로 유쾌하지가 않다.
단순히 고생했다는 생각 때문만은 아니다. 내 자신이 부족하여 자랑스럽고 떳떳했다는 자부심이 도무지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군 생활에 어떤 열등의식이 있다.
그런데 아들은 반대다. 어쩐 일인지 내가 나라에 빚진 것을 아들이 갚아 준 느낌이 들어 더욱 감사하다.
이는 잔잔한 행복감을 느끼게 한다. 아들은 카투사 후반기 훈련 시험에서도 일등을 했다. 여단장에게 우리 가족이 파티 초청을 받았을 때, 아들이 격식을 갖춘 사열을 지휘했다. 또한 멋진 우승 트로피를 받을 때는 남다른 감격을 맛보았다. 아들은 군 동료들이 가장 잘 따르는 리더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아들은 좀 특별한 면이 있다. 군에 입대하여 제대할 때까지 국가에서 받은 2년치 월급 1,895,510원을 단 한 푼도 찾지 않고 통장 째로 저축했다가 제대 기념으로 하나님께 전액 헌금으로 드렸다. 호산나 교회를 건축할 때도 학교에서 몇 년 동안 적금으로 부었던 돈을 통장 째 드렸는데, 이번에도 또 드린 것이다. 군에서 주는 사병월급이 9만 원도 안 되는데 이것을 2년 내내 한 푼도 찾아 쓰지 않고 모았다 드린 것이 더욱 감동을 주었다. 나는 며칠 전에 심각한 고민을 해야만 했다. 제대를 앞둔 아들이 나에게 특별한 제안을 했기 때문이다. “군을 마치면 내년에 곧바로 대학에 복학하지 않고 1년이라는 시간은 하나님께 드리기를 원합니다. 대학을 곧장 복학하면 내 삶을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드릴 수 있는 기회가 올 것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대학 진학에서 남들이 흔히 하는 재수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 년쯤 하나님께 드린다고 사회 진출이 늦어지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되고, 국가를 위해서도 2년을 드렸는데 하나님께 1년을 드리지 못할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학생 때부터 오랫동안 관여해 오고 있는 ‘yes come’ 이라는 초교파 기독교 공동체에서 춘천지역 중고등 학생을 전담할 사역자를 찾고 있는데 나를 필요로 한다고 요청하니 이 부르심에 응답할 책임을 느꼈습니다. 현 상태에서 나밖에는 적임자가 없다고 합니다. 누군가는 이 일을 해야 되는데, 부르심의 사명을 느낍니다.
1년 동안 영어도 더 익히고, 책도 더 열심히 보고, 하나님 일도 마음먹고 더 열심히 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부모님의 허락과 축복 속에 딱 1년만 이 일을 하고 난 후 대학에 복학하고 싶으니 허락해 주십시오. 부모님이 막으면 대학으로 복귀하겠습니다”하는 것이다. 나는 처음에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하나님의 일을 꼭 그런 식으로 해야만 되느냐?
네가 꼭 그 일을 해야만 되느냐? 네가 신학 코스를 밟고 있다면 몰라도 이건 네 길이 아닌 것 같다. 네 생각은 상식적이지 않고 어딘가 특별나다. 특별난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지 않느냐. 공백기가 3년이나 된다면 대학 공부에 연속성이 깨지지 않느냐.’ 많은 대화를 했지만 아들의 결연한 의지를 확인한 후 나는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순수 자원봉사로서 일 년 동안 중고등학생들의 가슴에 하나님 말씀의 불을 지피겠다는 거룩한 뜻을 못 하게 할 아무런 명분도 찾지 못한 것이다. “의섭아! 어찌 되었든 나는 너를 믿는다. 너의 심사숙고한 최종 결정을 존중할 테니 네 원대로 하거라.”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아들을 축복해 주시고, 장래를 인도 하시며, 이 아들의 삶을 통해서 영광 받아 주시옵소서.
베드로전서 5장 말씀의 베드로처럼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게 하시고, 모두의 본이 되게 은혜를 주옵소서. 시들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을 주시옵소서. 아멘.
*(흐르는 물처럼 세월이 1년 하고도 6개월이 지났다.
일 년 동안 하나님의 일을 하는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대학 복학을 해서 한 학기를 마친 후, 성적표를 받아 확인 한 지금 감사한 마음으로 또 다시 ‘축복한다. 아들아!’ 라는 글을 쓰게 되었다....)
2. 축복한다. 아들아! ......
예수님의 수제자 중의 수제자는 역시 사도 바울이 아닐까 한다. 바울은 베드로를 비롯한 12사도들처럼 살아생전에 예수님께 직접 가르침을 받았거나 예수를 친히 본 일이 없다.
오히려 그는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입장에 섰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특별히 만났고 이를 계기로 목숨 내걸고 예수를 전파하는 사람이 되었다. 예수를 전파하되 이방의 빛으로 부름 받은 자신의 사명을 자각하고 세계로 통하는 관문이라 할 수 있는 로마에 까지 예수를 알리는 역할을 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이라는 사실을 온 세상 땅 끝까지 전파하는 이 일을 위해서 모진 고생도 기쁨과 감사로 받았고, 감옥에도 여러 번 갇혔으나 오히려 위기를 기회로 삼아 신약성경의 절반이 넘는 옥중서신을 기록함으로서 기독교 신학의 토대를 놓았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을 체험한 것 이외에는 말하지 않겠다고 했다. ‘로고스’의 말씀이 ‘레마’의 말씀으로 체험된 ‘내 복음’의 말씀만을 말하고 전한다고 했다.(갈1:9-12)
바울이 만난 하나님은 단순히 머리에서 나온 이론적인 지식의 나열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성령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구원해 주시고 도와주시고 고쳐주시고 변화시켜 주시고 갈 길을 인도해주신 살아계신 하나님이셨다.
자기가 직접 보고 듣고 몸으로 체험한 하나님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전파하지 않겠다는 바울의 고백은 무한한 공감과 설득력을 준다. 나 또한 언제부터인가 복잡하고 공허하기 이를 데 없는 신학적 이론 같은 것이 싫어졌다.
하나님이 직접 성령으로 나타나신 이야기, 하나님이 직접 성령으로 말씀하시고 구원하신 살아있는 이야기가 더 좋아졌다.
듣기 좋은 천 마디 말보다 살아있고 검증된 레마의 말씀 한 마디가 더 가치 있고 영향력을 주는 생명 있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진지하게 성령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이야기 속에는 생명이 맥박 치는 숨소리가 들리고 살아있는 생명현상이 보인다. 누군가에게 하나님이 찾아 오셔서 복을 주시고 생명을 주신 거룩한 구원 사건들이 있다면 나는 서슴없이 글로도 쓰고 싶고 말씀으로도 증언하고 싶다.
나는 이런 말씀에 목말라 있고 사모하고 또 사모한다.
살아있는 은혜의 얘기이기 때문이다.
나는 언젠가 나의 아들에 대해서 ‘특별한 기쁨 특별한 행복’ 이라는 제목의 고백적인 글을 썼는데, 일 년 하고도 반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은 그 후속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아비 되는 사람이 자식 자랑 같아 보이는 글을 쓴다는 것은 웬지 쑥스럽고 부담되고 바보 같은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살아있는 하나님 은혜의 얘기이기 때문에 감히 용기를 내어본다. 아들은 2008년도 12월 24일 군에서 제대한 후 대학 복학을 미루고 2009년도를 하나님께 온전히 바쳤다.
국가를 위해서 2년을 바쳤는데 하나님을 위해서 1년을 헌신하지 못하겠느냐는 말대로 약속을 지킨 것이다.
매주일 춘천지역의 중, 고등학교를 순회설교하면서 예배 공동체를 꾸려냈을 뿐만 아니라 호산나 교회 오후 예배를 일 년 동안 주관했다. 기도하고 말씀 보면 은혜의 말씀이 쏟아져 흘러 넘쳤고 모두가 감격해 했다. 아들의 설교를 일 년 동안 들었는데 이는 더없는 행복이 아닐 수 없었다.
신학을 전공한 나의 설교보다 아들의 설교가 더 영적 감화력이 있다는 말도 들었다. 더없이 기쁘고 감사하고 행복한 일이다. 아들은 매사에 성실하고 최선을 다한다.
밤을 새워 쎄미나 발제를 준비하는 모습을 옆에서 몇 번 지켜보았는데 그것은 한마디로 모범 그 자체였다.
아들은 매일매일 베드로 정형외과에 마련된 사무실로 출근을 했고 빈틈없이 짜여 진 일정을 따라 성직자처럼 살았다.
아들은 올해 대학에 복학을 했는데 사실은 약간 걱정을 했다. 공백 기간이 3년이나 되었고 더군다나 이공계 전공필수는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학기를 마치고 성적표가 나왔는데 그 어느 때보다 가장 우수한 성적을 획득했다. 전공필수와 기초필수 7과목에서 6과목이 A+ 이고, 1과목에서만 A를 받았다.
이를 환산하면 만점 4.5에 평균평점 4.43을 획득한 것인데, 이번 학기에도 전액 장학생으로 또 다시 선발되었다.
1학년 때도 비슷한 성적을 얻어 수석을 했는데, 지금은 더 좋은 결과를 얻은 것이다. 나는 아직까지 이렇게 잘 받은 성적표를 본 적이 없다. 내가 단순히 성적 자랑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아들이 얻은 열매는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마인드(mind)에서 맺은 열매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무슨 일이건 최선을 다하는 성실성은 하나님이 아들에게 특별히 갚아주신 은혜의 선물이기 때문에 감사한 것이다.
사실 내가 아들에게 특별히 해 준 것이 없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주신 것이다.
사람이 교육한다고 다 되는가? 절대로 아니다.
아들이 제대를 얼마 앞두고 휴가를 나왔다가 ‘봉화직염’ 이라는 눈병에 걸려 병원에 입원했을 때였다. 카투사 군목 한 분과 동료 장병 대 여섯 명이 춘천까지 위로 방문을 왔다. 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데 후배 동료 장병이 이런 말을 한다. “염 의섭 병장님이 제대하면 우리는 무슨 낙으로 남은 군 생활을 할지 막막합니다. 정말 걱정 됩니다....” 나는 늘 군 생활은 어쩔 수 없이 그저 그렇게 요령껏 보내는 것으로만 인식하고 있었던 터라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군목님과 동료들은 다음과 같은 말로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염 의섭 아드님은 특별한 사람입니다. 누가 보건 안 보건 진실하게 행하고 최선을 다하고 온유 겸손합니다.
예를 들자면 길에 휴지가 눈에 띄면 줍고 갑니다.
매사에 삶의 스타일이 그런 식입니다. 염 병장 때문에 부대 분위기가 확 달라졌습니다. 모두가 존경하고 따릅니다.
고참이 되면 으레 꾀도 부릴 줄 알고 편안해지려고 궃은 일은 빠집니다. 그것은 보편적 관례로 알고 모두가 이해해 줍니다. 그러나 의섭이는 스스로 이런 기득권을 다 버렸습니다.
제대를 앞둔 이 순간까지 초지일관 불침번 서는 일에서 조차도 의무를 다 분담해서 짊어졌고 헌신했습니다. 그래서 부대원들이 모두 존경하고 따르는 분위기로 바뀌었고 자율적인 화합도 이루어졌습니다. 염 의섭 병장님은 최고의 존경받는 리이더 입니다... ”
하나님은 내게 가장 큰 기쁨의 선물을 주셨는데 그것은 바로 이런 아들을 주신 것이다. 누구에게나 자식은 하나님이 주신 가장 보배로운 면류관이다. 그래서 특별하게 자식을 자랑하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내가 특별하게 아들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가장 살아있는 은혜스런 얘기이고, 하나님이 특별하게 복 주신 얘기를 서로 나눔으로서 은혜를 공유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복학을 하는 아들에게 마침내 항복했다. “아들아! 네게 하나님의 부르심(calling)이 있거든 그 길을 가거라. 이전처럼 더 이상 붙잡지 않겠다.
힘껏 밀어주고 축복해 줄 테니 네 원하는 대로 하거라.
하나님이 항상 너와 함께 하시기를 기도한다.....”
3. 자랑스런 아들 의섭에게.
장로회 신학대학 신학과 3학년 편입학 시험 합격을 축하한다.
그동안 여러모로 수고 많았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린다. 20명 지원에 2명을 선발하는 쉽지 않은 시험에서 합격한 것을 볼 때,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가 네게 있음을 믿고 감사드린다. 많은 사람들도 축하의 메세지를 보내왔다.
네가 한국 해양대학교를 가서 조선공학을 공부한 경험이 또 다른 가치와 의미를 줄 것이다. 만일 네가 곧장 신학대학을 갔더라면 어떤 미련 같은 것이 줄곧 따라다녔을지도 모른다. 일반학문, 타 대학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 같은 것....
그러나 너는 할 만큼 했다고 믿는다. 말하자면 일반대학을 한 것과 마찬가지의 자의식을 갖게 된 것이다. 이제는 한 점 의혹도 없이 떨쳐버리고 오직 하나님께만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인생의 진짜 공부를 하기 바란다. 너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이루어드리고, 하나님을 나타내는 복이 있기를 기도한다. 때마다 일마다 하나님께서 너를 도우시기를 기도하며, 항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평강이 함께 하기를 빈다. 너의 가는 길을 하나님께서 항상 지켜주시고 인도하시기를 기도하며.
너를 사랑하는 아빠가. 2월14일.
4. 장가가는 아들 의섭아. 너를 축복한다.
(*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흘러 아들이 장로회 신학대학교 신대원 2학년이 되었다. 진광교회 교육전도사로 일한지가 벌써 4년이 되었고, 다음 달 9월에는 결혼을 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하면서 또 다시 글을 쓰게 되었다)
사람이 사람을 얼마만큼 사랑하는지 그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내 마음과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 사람이 내게 어떤 이미지로 다가 오는 지를 보면 아주 쉽게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땅의 모든 부모가 그렇겠지만, 나는 아들을 생각만 해도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고, 마음이 따뜻해진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어도 훈훈한 열기 같은 것이 느껴지는 것이다. 아들이 있어 그저 기쁘고 행복한 것이다. 아들이 진실로 잘되고 행복하기만 바라고, 아들이 참으로 하나님께 기쁨이 되어 지기만을 바라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 하고 그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마음 든든해지고 위안이 되는 것처럼, 아들 얼굴을 생각만 해도 흐뭇하고 감사한 행복감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사람의 성품은 타고나는 것 같다는 생각을 나는 아들을 통해서 몇 번이고 확인한다. 이는 그야말로 천복(天福)인 셈이다.
아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내가 엄마 역할을 해야만 했다.
아내가 학교로 출근 하고나면 집에 남는 것은 나와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젓 병을 삶아 우유를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잠재우고 빨래하는 이 모든 일이 내 몫이었다. 그런데 갓난아기 때부터 유년시절을 지나면서도 아들은 단 한 번도 나를 힘들게 한 적이 없다. 일반적으로 아기들은 울며 보채는 것이 정상인데 아들은 단 한 번도 그런 일로 나를 괴롭힌 적이 없다. 그 모습을 본 의섭이 고모가 “저런 애 라면 10이라도 키우겠다”고 한다.
생후 몇 개월이 지나 엉금엉금 기어 다닐 때도 플라스틱 바가지 하나 주면 방안에서 혼자 떠밀고 다니며 놀고, 나는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글을 쓰고는 했다. 한번은 무척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새벽 2시경 무슨 북북 긁는 소리에 잠이 깼다. 뭔가 했더니 컴컴한 현관 입구 차가운 바닥에서 아들이 혼자 바가지를 긁으며 놀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때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대여섯 살 때, 우리 부부가 금요철야 가기 위해서 집을 나설 때면 “아들아. 동생과 사이좋게 놀고 9시 되면 불 끄고, TV 끄고 자거라. 엄마 화장품 같은 건 만지지 마라. 다녀올게. 착하지 우리 아들” 하면 말 그대로 순종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아들을 이웃집 어느 학부형 집에 잠시 맡기게 되었는데, 과자나 과일을 주면 꼭 이렇게 말한다는 것이다.
“아줌마 하나 더 주실 수 없나요?”
“왜 모자라니?”
“아니요. 집에 동생이 하나 있는데 갖다 주고 싶어서요”하면서 반드시 챙겨간다는 것이다. 하는 짓이 너무 어른스럽고 예뻐서 자기 집에 며칠간만 머물게 해달라고 부탁한 적도 있다.
자기 자식들도 보고 배우게 하고 싶다는 것이다.
이런 아들이 나의 뒤를 이어 하나님의 일을 하는 목사가 되고자 하니 나의 기쁨과 행복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나는 목회를 기대한 만큼 잘 못했지만 아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훌륭한 목회로 내가 못한 것까지 다 잘 할 것이라 믿는다.
하나님은 내게 아들에 대한 그런 믿음을 주셨다.
아들이 진광교회에서 받은 사랑과 은혜 그리고 교회로부터 받은 좋은 평가는 나를 행복하게 한다. 담임목사님과 사모님, 장로님, 그리고 몇몇 권사님들과 집사님들, 심지어는 같이 일하는 부교역자나 전도사님들에게서도 어쩌면 그렇게도 동일한 얘기를 들을 수가 있는지 송구스럽다. “염의섭 전도사님은 우리 진광교회의 보배로운 보석입니다. 우리 곁에 꼭 있어야할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염전도사가 있는 곳에는 늘 평화가 만들어지고 또 화평이 존재합니다. 그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자랑하지 않고 항상 겸손하고 온유하기까지 합니다. 염의섭 전도사님이 찬양을 인도하고 말씀을 전할 때는 항상 기대감 속에 은혜가 있고 강렬한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을 느낍니다.
그런 염 전도사님을 우리는 너무도 사랑하고 좋아합니다. 그런 아들을 두신 염 목사님은 복이 있습니다. 우리 진광교회도 복을 받았습니다.....”
이런 아들의 갓난아기 시절부터 유년시절 학생시절 청년시절 그리고 오늘의 아들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면 나도 모르게 행복에 겨운 잔잔한 미소가 입가에 번진다.
이런 아들이 벌써 장가를 간단다. 얼마 전 결혼식 날짜를 잡고, 사돈어른을 만나 인사도 나누었다. 아들은 진광교회에 처음 갔을 때부터 처녀들에게 인기가 만점이었다는데, 애초부터 “저는 사귀는 사람이 있습니다”하고 선언을 하고 아예 선을 그었다고 한다. 책임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확실하게 보여준 것이다.
그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며눌 아가는 사랑하는 아들의 반려자로 유일하게 선택된 사람이기 때문에 다시 보게 된다.
말하자면 아들에게 선택되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모든 신뢰와 권위를 동시에 가지게 되는 것이다. 아들이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 집 그 누구도 여기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고 아들처럼 똑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아들이 선택한 권위에 한마음 한뜻으로 무조건 찬성표를 던지는 것이다.
세상은 참 넓고도 좁은 것 같다.
사돈 될 양반이 나와 함께 춘천 중, 고를 다닌 동기동창이고, 같은 동향 사람인데, 그 따님과 나의 아들이 백년가약(百年佳約)을 맺게 될 줄 꿈엔들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아들과 며늘 아가는 햇수로 4년이 넘도록 사귀었는데 처음과 끝이 동일하게 신실한 믿음 안에서 해피엔딩이어서 감사한 마음이고 기쁨으로 축복하는 것이다.
나는 처음에 아들이 며늘 아가를 사귀고 싶다는 말을 들었을 때 흔쾌히 허락하지 않았다. 세상이라는 무대는 생각보다 넓은 곳이니 좀 더 시야의 폭을 넓히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라는 것이 그 첫 번째 이유였고, 우리 집은 비교적 힘겹게 살아왔으니까 아들은 무난한 가정의 따님을 만나 좀 더 무난한 삶을 꾸려가기를 희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며늘 아가는 아들보다 3살이나 연상이었던 것이다. 물론 나이 차이가 큰 문제는 아니지만 사회 통념상 보편적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아무튼 아들의 사람됨을 잘 아는 여러 곳에서 중신 제의가 들어왔을 때였다. 그럴 때마다 아들은 만나서 얼굴 한 번 대면하는 것조차 번번이 거절했다.
속이 상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아들아. 한 번만 이라도 만나 보면 좋겠다. 누가 부담을 주려는 게 아니다. 그저 편하게 한번 만나보라는 것이다. 다 그렇게들 하지 않니? 백화점에서 물건 하나를 살 때도 들었다 놨다 하면서 수없이 생각하고 선택하지 않니? 하물며 평생을 같이 살 사람이야 오죽하겠니? 그건 절대로 잘못되거나 나쁜 행동이 아니다. 오히려 외통수적인 네가 잘못일 수도 있지 않겠니. 그리고 결혼은 네가 하고 네가 최종 결정하는 것이지만 아무리 그렇다할지라도 부모인 우리에게도 최소한 30% 정도의 권리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너는 아예 처음부터 우리 의견이나 그 어떤 바램 같은 것을 박탈하는 것 같아 서운하구나....”
그럴 때마다 아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빠. 사람이 어디 물건입니까? 지금 그 사람과 사귀고 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까? 그 사람에게서 그 어떤 결정적인 흠이 보여 지기 전에는 절대로 다른 사람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그건 양심상으로도 사람이 할 태도는 아니라고 봅니다....”
한동안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렸다가 “아들아. 어떠냐 한번 볼테냐?” 하면 “아니오. 내가 만나고 있는 그 사람은 여전히 좋은 사람입니다....” 결국 나는 한 번도 아들의 뜻을 꺾어 보지도 못한 채 결혼 승낙을 하고 말았다. “아들아. 처녀가 30이 넘어 결혼하면 이런저런 손해가 많을 것 같다. 여자 입장에서 생각해 주고, 마음속에 평생 함께 할 배우자로 결정했다면 속히 결혼 하거라. 너도 복이 있는 사람이지만 네가 선택한 너의 신부 역시 참으로 복이 있는 여자다.
최종적으로 네가 선택했다면 분명 너 만큼이나 착하고 슬기로운 처녀임에 틀림없다고 믿는다. 이제 너의 선택을 존중하고 100% 인정한다. 너와 며늘 아가가 이룰 가정을 축복한다.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사랑받고 은혜 받는 복된 가정되기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지금까지 잘 커줘서 고맙다.
그 언제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아들 되기를 기도한다.
사랑한다. 아들아. 다시 한 번 더 너를 축복한다. 사랑 한다 아들아! 하나님의 행복으로 행복하거라..... ”
*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18-24)
*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엡5:22-28).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여짜오되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마19:4-9).
* 나의 바위요, 나의 구원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내 마음의 생각이
주님께서 보시기에 흡족하기를 소원합니다.(시19:14)
* 병거를 믿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기마를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믿습니다.(시20:7)
* 현실과 삶 속에 내재하시는 하나님의 현존과
역사를 초월하시는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의 양면성이다
(눅 17:21; 대하 2:5-6).
*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자가 하나님을 만나리라
(잠 8:17; 렘 29:11-14).
* 화목제물이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사랑의 극치요 정점이다
(고후 5:18-21; 요일 4:10-11, 2:2).
*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이는 주님의 비밀스런 은혜의 경륜이요 뜻이다
(요 1:29; 엡 3:2).
*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고,
하나님 찬양이 땅에 가득합니다.
주는 밝은 빛과 같습니다.
주의 손에서 광선이 나옵니다.
주께서 광선속에 그 능력을 감추십니다.
(하박국3:3-4)
* 우리는 언젠가는 하나님 안에서
조상들과 함께 눕는 자가 된다.
죽어서도 하나님을 모르는 애굽에 묻히기를 원치 않고,
신앙의 혈족이 묻혀있는 선영에 묻히고 싶다.(대하21:1)
* 여호와의 명을 받는 다는 것!
천지의 대 주재(主宰)가 되시고,
가장 높으신 분의 명을 받아 산다는 것!
가장 수준있고 품위있는 아름다운 삶이 아닌가!
(시147:15-19)
* 하나님은 기사(奇事)와 이적(異蹟)을 행하시는 분이시다.
사실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신비로운 기사와 이적이다.(시1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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