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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나의 궁극적 관심
내가 특별히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하나님 이라는 이름을 한순간도 잊지 않고 마음과 입에 달고 산다는 점이다.
무엇을 하든지 간에 잠재의식적으로라도 내 머릿속에는 하나님 생각으로 가득 차 있고, 하나님을 목말라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내게 있어서 궁극적 관심(窮極的 關心)인 셈이다. 이는 내 삶에 있어서 좋은 일을 경험할 때도 마찬가지고 나쁜 일을 만날 때도 역시 마찬가지다. 심지어는 내가 그 무슨 허물진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는 순간에조차도 하나님은 견책(譴責)하시는 음성으로 개입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부족하기 이를 데 없는 나로 하여금 “두 번씩이나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죽음의 순간에서 특별히 건져 살려주신 이유였다” 라고 신앙고백하게 만들어 주셨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말숨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의 존재를 만들어 주셨다. 그러니까 하나님이라는 의식구조(意識構造)가 ‘나’ 라는 존재 그 자체를 결정해주었고, 지금 이 순간 나를 지탱시켜주는 힘의 근원이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내 존재에 있어서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시는 분이시고, 먼저 하나님을 말하지 않고는 그 어떤 것도 말 할 수 없는 분이시다. 단 한 줄로 요약하자면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 이다.
지금 내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것도 100% 하나님 은혜요, 이 순간 하나님이 살 힘을 주시고 있기 때문에 내 존재가 허물어지지 않고 지탱되고 있는 것이다. 그 언제든 “너는 여기까지!” 라고 말씀하시면 그 순간 한 줌의 흙이 되어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는 존재! 그것이 바로 나다.
그러므로 내게 있어 오직 하나님 한분만이 궁극적 관심이 되신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하나님의 통치 그 자체,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고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는 나라가 이루어지는 그 자체를 소망하고 또 소망하는 것이다.
물은 흘러 강으로 모아지고 모든 강줄기는 결국 바다와 만나게 되어있다. 하나님은 마치 모든 것을 품어 아우르는 바다와 같고, 잡다한 모든 것을 쓸어 담아 녹여내서 불순물을 제거한 후 쓸모 있는 쇳덩어리를 만들어내는 거대한 용광로와도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데 현대인들, 특히 잘나고 똑똑하다는 그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일이나 돈 되는 일에는 그렇게도 관심이 많고 주도면밀하기까지 하면서도 내 존재의 근거가 되시는 존귀하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어찌 그리도 무심(無心)하게 지나칠 수 있는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너희는 힘써 주 너의 하나님 여호와를 알라. 내 백성이 여호와를 알지 못하므로 망한다고 호세아 선지자는 외쳤다(호6:6).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2:19).
그러므로 온 세상 땅 끝 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전파되고 기념되는 일은 우리가 사는 길이요, 이것이 선교의 사명이요 본질이다.
그런데 세상은 안타깝게도 등잔 밑이 어둡고, 나무는 보되 숲은 보지 못하는 경우가 어찌 그리도 많더냐! 불빛 가까이가 가장 밝은 것 같은데 도리어 가장 어둡고, 개체 개체의 사물은 똑똑히 인식하고 있으되 전체의 구도와 조화로움은 스스로 파괴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면서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조차도 분별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 어찌 통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모스 선지자는 탄식하기를 ‘내 백성이 물이 없어 기갈이 아니요, 양식이 없어 주린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했다(암8:11).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스라엘이 타락하여 하나님을 우상 섬기듯 하는 일이었다.
하나님은 죽은 자도 살릴 수 있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모든 문제의 궁극적인 해결 자가 되신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진정 만날 수만 있다면 '다 될 수 있다'는 말은 참으로 맞는 말이다. 하나님만이 절대 소망, 절대 생명 되시고 만복의 근원되신 모든 영들의 아버지가 되기 때문이다(히12:9).
그 위대하신 하나님이 우리 삶의 궁극적인 관심이 될 수만 있다면 그는 분명 놀라운 하늘의 은혜를 경험할 것이다. 죄 사함의 비밀을 체험하고, 부활영생과 천국의 기쁨까지도 맛보며 살게 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지식적으로 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고 구원을 경험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호세아 선지자가 ‘내 백성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 망 한다’ 할 때, ‘안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야다’(Yada) 라는 단어다.
‘야다’(Yada)는 원래 어떤 대상에 대해 잘 안다는 의미로 결혼한 부부가 “나는 그 여자를 알아. 나는 그 남자를 안다”라고 할 때 쓰는 단어다. 말하자면 부부가 한 몸을 이루어 ‘내가 네 안에 있고, 네가 내 안에 있는 상태(요14:10-11, 요15:4-5)’로 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단순히 지식으로 알고 인식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뼛속 깊이 속속들이 알고 체험하고 나의 일부가 되어 진 그 어떤 상태다. 내가 하나님을 안다고 할 때, 그 앎은 ‘로고스’(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의 ‘말씀=하나님’이 ‘레마’(내가 만난 나의 하나님)의 ‘말숨’으로 체화되고 경험된 그 어떤 것이다.
산마루 서신의 이주연 목사님은 ‘하나님을 아는 길’을 다음과 같이 쓰셨다.
【인간은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게 됩니까?
지적 대상으로 분석함으로써 알 수는 없습니다.
오직 창조주 앞에서 피조물로서,
영원한 존재 앞에서 유한한 존재로서,
거룩한 존재 앞에서 죄된 존재로서,
무릎을 꿇고 엎드려짐으로 알게 됩니다.
이러하기에 지식이나 정보가 아니라
은혜와 사랑으로 체험될 뿐입니다.
마치 큰 산을 알고자
산에 들어갔다가 길을 잃고
마침내 죽을 지경이 됨으로
그 산을 아는 것과 같다 할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비우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을 곰곰 묵상해 보자.
물은 말없이 스며 생명을 살리고,
향기는 소리 없이 번져 세상을 바꾸지 않던가.....
*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4-5).
* 내 백성이 물이 없어 기갈이 아니요,
양식이 없어 주린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
*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2:19).
*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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