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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영운 맥스소프트 CEO를 목회자로 부르신 하나님의 은혜.
나는 어느 날 우연히 ‘예수님의 기름 부으심을 사모하는 사람들’이라는 밴드에서 박영운 목사님이 쓴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에 관한 글을 읽게 되었다. 글도 물론 좋았지만,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알게 된 그의 범상치 않은 이력이 눈에 띄어서 한번 만나자고 제의했다.
광운 공대에서 전자공학과 한양공대에서 전자계산학(석사), ROTC 18기 통신장교 중위 제대 후 당시 제일의 기업 현대그룹에 공채되어 1982.7 현대자동차 전산실, 1988.5 아시아나 항공 창립멤버로 전산실 기획 및 OA 과장으로 스카웃 입사, 그리고 아세아 연합신학대학원을 마친후 이에 만족하지 않고 총신대 목회대학원과 총회인준 서울신학교를 졸업하고 합동교단의 목사가 되었다. 사업에 있어서도 한걸음 더 나아가 맥스소프트를 창업하여 CEO를 하는 동안 년 매출 7,80억까지 올랐고, 100억을 눈앞에 두고 상장하려던 순간 우여곡절 끝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 고생스러운 개척교회를 하고 계시다니 궁금한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특히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을 추구하는 영성을 목회철학으로 갖고 계신 점이 나의 마음을 끌었다. 우아한 몸집만큼이나 너그러운 성품에 출중한 실력까지 겸비하신 그와 지금 처해있는 어려운 목회 상황이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았고 내가 잘 모르는 비밀스런 사연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던 차에 나는 최근에 하나님께서 그를 특별히 부르신 은혜의 체험을 상세히 들을 기회가 있었다. 박영운 목사님의 지금까지 살아오신 인생과 신앙 스토리는 나 혼자 알고 있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마치 천국 복음처럼 하나님이 친히 나타나시고 섭리하시고 역사하신 생생한 은혜의 흔적들은 서로 서로 은혜를 나누고 전파하여 피차에 견고한 믿음의 반석위에 굳건히 서야할 필요를 느끼기 때문이다.
(1) 박영운 목사님의 유년시절
박영운 목사님은 1958.4.27 강원도 철원에서 출생하셨다.
그의 가문은 조상 대대로 유교, 불교, 무속신앙으로 귀신을 섬겼는데 한줄기 구원의 빛이 그 가문에 비추었으니 그것은 지금의 아내가 된 김창숙 전도사 사모님이 군인이셨던 아버지 부대를 따라 동네 근처에 있는 근남 초등학교 2학년에 전학을 온 것이다. 그는 주일학교를 다니던 크리스챤 김창숙을 좋아하게 되어 자기도 교회를 처음 나가게 되었는데 그 후 성장하면서 사랑을 고백하고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세례를 받고 권사 장모님의 강권에 못 이겨 교회에서 결혼하기에 이르렀다. 그를 하나님의 종으로 특별히 부르신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는 이렇게 알게 모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결혼 후 예수쟁이 아내와 귀신쟁이 조모 간에 치열한 영적전쟁이 일어났다. 수많은 고초를 아내는 겪어야 했다. 그러나 그 모진 핍박 속에서도 아내는 마침내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제사를 없애고 추도예배로 온 가족을 예수 믿는 가문으로 변화 시키는데 성공했다. 그 기간이 무려 10년이나 걸렸다. 1980. 2.17 결혼 후 1990.12.4 밤 10:30, 아내가 여전도회장 3번이나 연속해서 봉사하던 지하 한샘교회에서 그가 성령세례(불,방언,음성)로 예수를 인격적으로 ‘나의 하나님’으로 만나기 전까지 누구나 그렇듯이 교회는 다녔지만 그 역시 육에 속한 세상사람 이었다. 한마디로 남부러울 것 없는 세상적인 성공과 출세에 교만과 방종의 극치를 달렸다. 그는 큰 몸집에 걸맞게 현대 정주영 회장의 막걸리 말술을 배웠고, 아시아나 박삼구 회장의 위스키 병술을 익혔다.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로 만나지 못했으면 자기는 조부님처럼 간경화나 간암으로 지금 이 세상에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이런 자기의 영적 상태를 지켜본 아내는 한샘교회 권영화 목사님(현 진주강남교회 당회장)과 한정란 사모님과 함께 그를 구원받게 하기 위하여 특별기도에 돌입했다.
(2) 신앙은 변화를 뜻한다.
모두가 합심하여 기도를 시작한지 1년 만에 성령님의 불의 응답이 임하였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는 할렐루야!로 임하셨고 그를 목회자가 되도록 섭리 하셨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회심을 이렇게 말했다.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행26:18).
그도 역시 예수를 ‘자기 자신의 하나님’으로 신앙고백 하고 난 후 바울처럼 180도로 삶이 변화되었다. 그토록 좋아했던 술이 끊어진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날 구원하기 위해 내대신 죽어주신 예수만 생각하면 길을 걷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눈물이 줄줄 흘렀다. 한량없이 부어주시는 주님의 은혜 때문에 도저히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런 가운데서 새벽마다 깨워주시는 성령님의 인도로 새벽에 교회에 나가 예수님을 만났다. 방언 통변으로, 환상으로 신령한 성령님의 은사를 통해 주님에 대한 믿음은 깊어져만 갔다.
그리고 그가 만난 좋으신 예수를 전도하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급기야 그는 아시아나 항공 정보통신부 과장의 직책으로 맡겨진 항공기 승무원들의 전산교육시간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3시간의 교육을 2시간에 마치고 한 시간을 예수 믿으라고 외쳤다. 아니나 다를까 본사 교육부장의 호출이 왔다.
"아니 20년 믿은 나도 조용한데 일 년도 안 된 초자가 왜 이리 설치냐? 그만해!...."
그러나 그는 그칠 수가 없었다. 그의 영혼 속에서 용솟음치는 복음의 열정을 누를 수가 없어 교육시간에 계속하여 전했다. 그리고 이어서 회사에 일찍 나와 기도하고 공부하는 성경읽기 모임을 만들었다. 처음 세 사람이 모였는데 25년이 지난 지금까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큰 모임으로 자라났다. 하나님이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은 진주에서 큰 목회를 하고 계시지만, 그 당시 조그만 개척교회 한샘교회를 이끌고 계신 권영화 담임목사님이 어찌나 존경스럽던지 물심양면으로 섬겨 드렸다. 아내야 그동안 얼마나 충성했겠냐마는 그도 그 충성스러운 섬김과 봉사에 동참한 것이다.
그 당시 귀했던 PC를 먼저 선물했다. 그리고 양복을 맞춰 드리고 맛있는 식사를 주기적으로 가족을 모시고 나가서 대접했다. 지금도 지나간 그 때를 생각할 때마다 흐뭇해한다.
주님 말씀처럼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되다’는 말씀을 체험하는 나날이었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갔다. 그는 제일 먼저 가족 구원이 시급하다고 여겼고, 할머니를 전도해서 70세에 예수를 영접하게 하셨다. 그 후 할머니께서는 28년을 예수 믿다가 98세에 소천 하셨다. 이어서 부친 박근수, 모친 이영애 두 분이 예수를 영접하셨고 이어서 5남매의 형제자매를 비롯하여 그 가족이 모두 예수를 영접했다. 할렐루야!
(3) 꿈에도 생각지 못한 신학교를 가게 되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실 때 그 언제나 사람의 생각보다 앞서 행하시며 먼저 하나님의 뜻하시는 예정(豫定)과 섭리(攝理)가 있다.
이는 깊은 영적인 차원이기 때문에 믿음으로만 깨닫게 되어있다.
그동안 신앙생활 하던 한샘교회에 또 다른 사역자가 오는 것을 계기로 박 목사 가족은 그의 아내 친정식구들이 다니던 명성교회로 적을 옮기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말씀이 약한 그에게 말씀의 위력을 보여주셨다. 그가 하나님께 부름 받은 소명은 마치 사도행전 26장에 나오는 사도 바울과도 같은 것이었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행26:14-18).
1994년 4월 부활절 주일 이었다. 간절히 은혜를 사모하며 기도하던 중 하나님께서 그의 입술을 주장하사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는 여호와 하나님이라. 내가 나의 종 아브라함을 부른 것처럼 너를 나의 종으로 부른다. 너는 음란하고 패역한 자들을 구하라"
할렐루야! 그는 하나님 아버지께 직접 들은 소명(召命)의 말씀을 그의 아내에게 제일 먼저 전했다. 그러나 아내는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아내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받아들이기 너무 벅찼고, 외면하자니 두려웠고 그야말로 혼란스러운 느낌이었다.
특히 아내는 겉으로 보이는 남편 모습 속에서 목사보다는 사장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개척교회 사모의 어려움을 많이 보아온 지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자신도 "아니 이 좋은 컴퓨터 기술을 펼쳐 돈도 한번 크게 벌어보고 장로로써 예수를 섬기면 안되겠나. 꼭 목사가 되어야 하나?"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신 대로 그의 인생을 이끌어 가시기 시작하셨다. 뜻을 정하지 못하고 갈등하는 그와 그의 아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 일이 있고 나서 한 달 내에 두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특별하신 부르심을 확인시켜 주셨다. 당시 그의 아내의 오빠 부인인 이현옥 전도사와 개척초기부터 인연을 맺은 권영화 목사님, 이렇게 두 분 다 어느 날 기도하는 중에 그를 하나님이 목사로 부르셨으니 이 말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이현옥 전도사는 집으로 찾아오셔서 직접 전해주셨고 권 목사님은 진주라 오지 못하시고 전화를 걸어 알려주셨다. 그리고 또 하나의 사건이 있다. 지금은 소천하신 박종면 전도사가 그 당시 오산리 최자실 기도원에서 3일 성경통독 집회를 하는데 부부가 함께 올라갔다. 둘째 날 저녁이었다. 이사야서를 읽어 나가는데 갑자기 이사야 53장5절 말씀이 크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그리고 교만하기 이를 데 없던 자기 자신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한 번은 사내에서 끈질기게 전도하는 부하 직원에게 말하기를 “00 대리! 나보고 예수를 믿으라구? 여기 나 좀 봐! 이 주먹을 믿게나!” 했던 것이 생각나면서 부끄럽고 죄송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우리’는 사라지고 바로 ‘나’의 허물과 ‘나’의 죄악으로 인해서 ‘내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사실이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그 순간부터 그는 목 놓아 울었다. ‘로고스’의 말씀을 그 자신이 먹고 자신이 체화(體化)한 ‘레마’의 말씀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그 이후 그는 그 집회에 두 번 더 참석했다. 일 년에 한번 꼴로 한얼산 기도원과 산곡 기도원 성경통독에 참석한 것이다. 이젠 성령 하나님 체험과 그 체험이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는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말씀을 통해서 조명해주시니 기쁘기 이를 데 없었다. 할렐루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란 참으로 간사한 존재다.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는 세상에 대한 미련이 남아 깨끗이 정리되지 못하고 갈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와 그의 아내는 주님의 부르심에 온전히 결단하고 순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세월이 가던 어느 날, 1996년 초에 생긴 일이었다. 사랑하는 그의 아내가 갑작스럽게 대수술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절대 절명의 순간을 아내는 결단을 촉구하는 주님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여보 당신은 주님 말씀대로 순종하세요. 목사가 되세요” 했다. 그래서 그도 신학을 해야 하겠다 다짐을 하고 준비하려고 그해 말부터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고 아내와 손잡고 다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IMF가 온 1997년 가을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맥스소프트를 창업하도록 인도하셨다. 그리고 IMF로 고급 실업자가 생기자 상대적으로 소프트웨어 개발인력의 인건비도 싸져 회사엔 커다란 이익을 가져다주게 되었다. 3명으로 시작한 회사가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돈도 많이 벌었다. 아내와 그는 하나님께 감사해서 예수님께 더욱 충성했다. 그 때에 주님께서는 아내를 통해 이제는 신학교를 가야만 한다고 재차 말씀하셨다. 그는 1999년 시험을 보고 뉴밀레니엄 2000학번으로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M.div 1기로 입학을 했다. 그는 직장과 신학교 생활을 동시에 해야만 했는데, 그 당시 야간에 M.div 과정 신학대학원은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초교파)이 유일한 학교였기 때문이다. 그는 후일 총회 신학대학원(합동)을 또다시 공부하고 합동측 교단의 목사가 되었다. 할렐루야!
(4) 행복했던 신학생 시절
아세아 연합신학대학원 목회학 신학석사 과정 1기 원우회장이 된 그는 사업에서 번 돈으로 1기 40명의 겨울 코트를 사 입혔다. 그리고 매월 한 번씩 밤에 삼각산 기도원으로 함께 올라가 산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참으로 은혜가 충만한 신학교 생활이 아닐 수 없었다. 그와 더불어 회사는 일취월장 발전했다. 주경야독하는 그를 주님께서 기뻐하신다는 반증이 곳곳에서 나타났다. 회사의 주식 주당 액면가 5천 원짜리를 2만2천5백 원에 매입하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결국 자본금 5억 원으로 증자하면서 20%만 주는 조건으로 4억5천만 원이 투자유치된 것이다. 그에 따라 매출도 매년 200%가까이 신장되었다. 그 후 7년 동안 한 번도 흑자를 내지 못한 해가 없을 정도였다. 왜 이런 축복이 왔을까? 자기 자신이 잘 해선가? 아니다. 그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주님께서 인도해 주신 신학교에서 열과 성을 다해 공부하였기 때문이었고 졸업과 동시에 개척하여 복음을 증거 하겠다는 약속을 주님께서 기뻐하셨기 때문이었다고 그는 확신한다. 참으로 주님이 그의 기업을 경영해 주셨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신학생 동기 중에서 등록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등록금을 대주는 손길을 기뻐 받으시고 대주주인 그에게 주당 5만원에 주식을 달라는 지인들이 줄을 서도록 만들어 주셨다. 그래서 주식을 팔아 좋은 집도 마련하게 해 주셨고 아이들에게도 풍족한 지원을 할 수 있게 해 주셨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뉴욕으로 동경으로 홍콩으로 해외 출장에 동반하는 축복도 주셨다. 그동안 아내가 꿈꿔왔던 모든 것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허락하고 계시다고 늘 생각하였다. 이 모든 것은 장차 주님께서 쓰실 고난의 날을 위해서 미리 마음껏 누리게 하신 것이었다고 그는 지난날을 회고한다. 하나님은 그로 하여금 세상부귀 영화가 얼마나 보잘 것 없고 헛되다는 것을 미리 충분히 체험시킨 것이다.
그래서 지금 개척교회 하면서 겪는 온갖 어려움들에 대해서 흔들리지 않고 세상 그 무엇을 부러워하거나 미련을 갖지 않을 수 있는 내적인 힘을 가질 수 있도록 미리 훈련시키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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