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_자유게시판
현대 문명과 과학이 아무리 발달했다지만 아직도 해내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생명체 하나를 만들어 내지는 못하는 것이 그것이다.
배아 줄기세포나 둘리 복제는 성공했을지 모르나 그 흔한 풀 한 포기, 모기 한 마리 인위적으로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그래서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라고 신앙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한다. 사람이 못하는 것을 하나님이 하셨고, 하나님만이 모든 생명을 지으시고 주관하시고 섭리하신다고 믿는 것이다. 이 믿음이 참된 진리요 행복의 열쇠다.
하나님만이 모든 생명체를 만드셨고 하나님만이 생명의 주인이라는 선언은 가장 뛰어난 깨달음이요 진리의 선언이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생명을 가볍게 여길 권리가 없고, 오직 생명을 사랑하고 존중해야 마땅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외경(生命畏敬)을 명령하시고 가르치심으로 행복의 열쇠를 스스로 찾도록 하셨다.
동물이건 식물이건 생명현상 속에 숨겨져 있는 비밀은 우주의 신비보다 더 깊고 오묘하다고 한다면 지나친 것일까?
우리 집 진돗개 '별이'가 지난 12월 그 추운 날씨에 새끼를 5마리나 낳았는데 생후 60일도 안 되었지만 어느덧 확연히 눈에 띄는 존재감으로 자기를 드러내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놀라운 일이다. 젓을 떼는가 싶더니 밥을 먹기 시작하면서 어미도 으레 그랬듯이 조그만 새끼들도 밥을 놓고 으르렁 대며 싸움을 한다. 그리고 하루 종일 어미를 졸졸 따라 다니면서 개가 취할 수 있는 모든 습성을 그렇게도 빨리 배우고 익힌다.
매일 이른 아침이면 별이와 함께 새끼 5마리가 창가 데크에 와서 꼬리를 흔들며 문안인사를 하는데 얼마나 정이 들었든지 이제는 그 어떤 새끼도 사사롭게 대하거나 포기할 수 없게 되었다.
얘들이 크기 시작하면 감당할 수 없으니 빨리 남을 주던지 분양하라고 걱정이 태산 같지만 어느덧 얘들의 존재감이 커지게 되면서 한 가족 같이 되었고, 그 어느 녀석도 쉽게 포기가 안 되는 것이다.
나와 얘들은 나도 모르는 사이 생명 대 생명으로 만나게 되었다.
나의 일상생활에서 얘들은 그 어떤 삶의 기쁨과 재미마저 주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얘들을 돈 몇 푼에 사사롭게 사고판다는 것이 죄스럽게 느껴질 뿐만 아니라 얘네 들 앙증맞은 예쁜 속눈썹이 눈에 아른거릴 때면 하나님의 오묘하신 솜씨에 찬탄(讚嘆)과 감격마저 솟아나는 것이 아닌가!
억만금을 줄지라도 인위적으로 이런 생명체를 만들어 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이렇게도 자연스럽고 쉽게 생명들이 태어나고 또 생명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얼마 전 자랑스러운 한국인 좌담회에서 전(前) 문화부 장관을 지낸 이어령 씨는 ‘사랑과 생명’이라는 주제로 강의할 때, ‘좋아한다’와 ‘사랑한다’를 구별하여 다루었는데 깊은 통찰력이 돋보였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좋아한다’와 ‘사랑한다’는 서로 엇비슷한 것 같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상당히 다르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고슴도치도 제 새끼가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법이며, 사람도 제 자식이 아무리 못나고 병신 같아도, 설령 죽을 만큼 자기를 아프게 하고 고통스럽게 한다 할지라도 남의 잘난 자식과 바꿀 부모는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다. 자기가 낳은 자식을 자기가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 자식이 약하고 모자라기 때문에 더 애착이 가고, 그 자식이 속을 썩이고 고통스럽게 하면 할수록 더 가까이 집착하게 하는 이유는 사랑 때문이다.
그러나 ‘좋아한다’는 것은 전혀 다르게 반응한다.
상황과 조건에 따라 수시로 변하기 때문이다.
그 어떤 것이 마음에 들지 않게 되거나 싫어지면 미련 없이 떠나게 되어있다. 그 이유는 어느 순간 좋아했을 뿐이지 진실로 사랑한 적은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랑한다는 차원에는 본질적으로 영원성(永遠性)과 영속성(永續性)이 있지만 좋아한다는 차원에는 그런 것이 없다.
우리는 모든 생명들을 존중하고, 사랑으로 대할 수 있도록 마음을 좀 더 크게 하고 넓혀가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예수께서 반문하셨다(마16:26).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는 말씀도 사랑의 본질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준다(렘22:3).
*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악을 용서하시고 받으실 때
우리는 하나님께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찬송과 영광이 될 것이다(겔20:40-44시96:8).
* 신앙고백의 첫 번째는
내가 하나님께 모든 죄를 용서받고 용납되었다는 것이다.
구원의 경험은 용서를 체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요8:10-11마9:6 눅24:27 사55:7 롬4:7 히9:22).
* 내가 주님께 원죄를 용서받고 받아들여졌으니
나 또한 남을 용서하며 살아야 한다.
하루 백번이라도 회개하면 받아들여야 한다(마6:12 요20:23 마18:21).
* 남의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곧 나의 영광이 된다는 것은
놀라운 주님의 영적인 약속이다(잠19:11).
* 하나님처럼 마음을 넓히지 않고는
남의 허물을 용서할 수 없다.
사랑에 빚진 심정은
너그러운 아량으로 용납할 수 있게 한다
(왕상4:29 고후6:12마6:12마18:24롬8:12,13:8).
◆ 말숨 산문집 제7권 '그대 안해 나의 어여쁜 신부여'가 출간되었습니다. 제게 문자나 메일로 답신(주소명기) 한번 주시면 보내드리겠습니다.
◆ 저는 신앙의 여정 가운데 특별한 의미의 삶과 죽음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어느 교회이든 제게 간증 설교할 기회를
주시면 기꺼이 제 자신을 헌신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말숨' 산문집 1권을 구매해 주시면 1권이 사랑의 선물로
전국 교도소에 님의 이름으로 기증됩니다.
(각권 13,000-20,000원. 전7권. 농협:301037-51-098385.
호산나교회 010-9059-4037)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