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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라마조프 가(家)의 형제들에 나타난 말숨 영성(靈性)
(* 아래 글은 말숨 산문집 제8권, 사명이 있는 자는 죽지 않는다의 마지막 추가 원고로 쓰여졌습니다. 책을 교정하는 동안 여러편의 글이 쓰여져서 불가피하게 쪽수가 늘어났습니다.
원래 200쪽 정도로 기획했으나 270-280 쪽이 되었으며 12월 9일쯤 출간 예상 합니다.)
신학생 시절, 지금은 고인이 되신 한국 신학대학 박봉랑 교수님(하버드 대 Th D.)께서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강의하시면서, 도스또예프스키가 쓴 ‘까라마조프 가(家)의 형제들’을 소개했다.
그의 대표작 죄와 벌, 악령, 그리고 까라마조프 가(家)의 형제들은 고전 중에서도 가장 읽기 어려운 책으로 꼽히는데 이를 통해서 여러 인간 군상(群像)들과 인간 실존을 그보다 극적이고 적나라하게 드러낼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라는 말과 신학도 라면 반드시 읽어야할 고전 중의 고전이라는 것이다.
도스또예프스키의 생애 마지막 작품인 이 소설은 작가가 평생 동안 가졌던 사상의 집대성이자 종결 점으로 자신의 생애를 통하여 그가 해왔던 생각과 고민의 결정체라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평생을 통하여 선과 악 사이를 깊이 살펴 연구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가 쓴 문학작품들은 주제의식이 매우 진중한데,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선과 악 사이를 오가며 방황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나는 몇날 며칠이고 무려 1700페이지에 달하는 상,중,하로 나온 대작 까라마조프 가(家)의 형제들에 매달렸다. 이 책을 다 읽기까지 도무지 책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예측을 불허하는 작가의 무한한 상상력은 흥분과 긴장에 전율 하게 했고, 이 작품 속에 나오는 여러 인물들을 통해서 하나님과 나와 악마의 실체를 눈에 투명하게 들여다보는 듯했기 때문이다.
신학은 영성화(靈性化)의 과정을 중요하게 다루는데, 이는 세 존재, 즉 하나님과 나와 악마의 존재를 깊이 경험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하나님을 체험한 만큼 나를 보게 되고, 동시에 그만큼 악마를 경험하게 된다.
현대판 막장 드라마를 연상케 하는 복잡한 구성과 인간 내면의 묘사, 이를테면 인간의 구원과 신의 존재를 묻는 무거운 주제의식을 통해서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이다 라는 주제를 밝혀냈던 것이다.
소설 속 일련의 사건들은 ‘삶과 죽음’, ‘선과 악’ 등의 신학적인 주제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이 작품의 주요 등장인물 들은 이미 제목에서 알 수 있는 대로, 까라마조프 집안사람 들이다. 아버지인 표도르와 그의 세 아들, 드미뜨리, 이반, 알료샤, 그리고 사생아인 스메르자코프가 이 집안의 구성원들이다.
이 책은 아버지 표도르의 살해를 둘러싼 심리적 갈등 위에 전개 되는데,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기 위한 존속 살인에 관한 이야기다. 러시아의 한 시골 도시를 배경으로 까라마조프가의 늙은 홀아비인 표도르는 방탕한 호색한이며 물욕과 육욕의 화신으로, 두 아들 장남 드미뜨리와 둘째 이반은 증오의 대상이다.
까라마조프가의 3형제 역시 아버지 표도르의 선한 면과 악한 면을 이어받아, 장남 드미뜨리는 방황을, 차남 이반은 냉쳘한 무신론자, 삼남 알료샤는 천사 같은 신앙인이다. 표도르 자신에게 이런 선과 악이 모두 잠재되어 있었고, 선과 악 사이에서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지친 그의 행동들은 육체적 쾌락만을 추구하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세 형제들이 각기 다른 성품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데, 장남인 드미뜨리가 이 이야기의 주된 사건을 만들어간다. 죽은 어머니의 유산에 대해 권리를 가지고 아버지로부터 자기 몫을 받기 위해 왔던 장남 드미뜨리는 그루셴까라는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질투에 불타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닌다.
그리고 장남 드미뜨리와 차남 이반 형제 사이에는 드미뜨리의 약혼녀인 까쩨리나 이바노브가가 연관되어 있다.
장남 드미뜨리는 부친 살해의 혐의를 받고 재판도 그에게 유죄를 선고하지만, 실은 간질병의 특성을 알리바이로 이용한 사생아 스메르자코프의 범행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철저히 무신론자인 차남 이반의 사상적 감화를 받고 저질러진 일이었다. 이와 같은 줄거리가 전개되는 사이사이에 들어 있는 보석과 같은 명언과 그 시대의 갈등들이 녹아 있다.
특히 조사마 장로가 죽음을 맞이하며 하는 이야기들에 보면 물질적인 것 보다는 신앙생활 또는 정신적인 수양, 이웃에 대한 따뜻한 배려를 강조 한다. 정말 놀랍게도 이 이야기는 지금의 우리 시대에 벌어지는 인간성이 말살되고 물질이 더 우위에 있는 모습을 마치 예언이나 한 듯 백 년 전에 이미 훤히 내다보았다는데 있다.
어쩌면 작금의 물질 위주의 사회는 이미 그 때 시작 되었고 거기에 따른 자연스런 폐해들을 도스또예프스키는 혜안으로 내다 본 것이다.
이 소설의 진짜 내면적인 줄거리를 이루는 것은 ‘신이 없으면 모든 것이 용서 된다’는 철학으로서, 차남 이반과 삼남 알료샤 그리고 알료사의 스승인 조시마 장로 사이에서, 러시아의 미래를 상징하는 알료샤의 더럽혀지지 않은 순백(純白)의 영혼을 서로 빼앗으려는 형태로 전개되는 사상적 격투라고 할 수 있다.
작가의 선과 악 사이에서의 고민, 신의 존재 유무에 대한 고민, 그것은 바로 우리의 고민이다. 우리는 선을 추구하는 동시에 악의 유혹을 느낀다.
신을 믿으면서도 존재에 의혹을 갖고, 신을 부정하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신의 존재에 의지하는 인간의 나약함을 보인다. 이 책 속에서 했던 작가의 이런 고민을 우리도 평생 하며 살아간다.
도스토옙스키가 이 작품을 통해서 하고 싶었던 말은 이미 그 자신이 말했던 것처럼 이 한마디였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을 선택하겠다!”
나는 최근에 뜻하지 않게 말숨 수도(修道)교회를 열게 되었다.
호산나교회를 사임할 때는 그것이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래전에 읽었던 까라마조프 가(家)의 형제들에 나오는 영적인 스승인 수도사 조시마 장로와 미래를 구원할 순백의 영혼으로 상징되는 알로샤 그리고 수도원에서 펼쳐지는 인간구원의 궁극적인 희망의 찬가를 기억하게 하셨다.
영적 스승 조시마 장로와 그의 제자 알료샤는 까라마조프 집안에서 가장 반대의 색을 띄고 있는 구원의 상징이다. 이반이나 드미뜨리 두 형 모두 각자의 까라마조프 적인 파장을 가지고 있지만 알료샤 에게는 부담 없이 하나로 합쳐져 속내를 드러내고 고민을 털어놓는다. 그는 복잡하게 뒤엉킨 실마리를 모두 풀어내고 인물들에게 용서와 화해로 이끌어가는 역할이다. 말하자면 흔들리기 쉬운 인간들에게 이정표가 되어주는 존재다. 딱딱하거나 훈계를 하기 보다는 따뜻함이 묻어나는 인간적인 가르침을 전달하는 역할이다.
동네 아이들 싸움에서도 흔들리거나 하는 것 없이 하나하나 문답을 하며 그들을 스스로 깨치게 하는 인물, 나중에는 까라마조프 집안을 구원하고 더 나아가서 미래 사회의 이정표까지 제시하는 인물이다.
바로 이것이 내게 새로운 용기를 주고 ‘말숨 수도(修道)교회’ 라는 이름으로 다시금 나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나는 즉시 다음과 같은 글을 쓰면서 마음의 정리를 굳게 했다.
말숨 수도(修道)교회를 열면서.....
30년 넘도록 해오던 목회 일선에서 한발 비켜선지 벌써 1년이 다 되어간다.
심장이 너무 안 좋아서 이제 그만 쉬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던 참에 그동안 10년 넘도록 섬겨오던 호산나교회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사임하지 않으면 안 될 명분 또한 생겨났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오직 은혜로 몸을 회복시켜 주셨을 뿐만 아니라 내 생애 마지막으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고자 하는 마음까지 주시니 감사하기 이를 데 없다.
가평 북면 목동 가까운 어느 산자락 골짜기에 아름다운 2층 전원주택을 짓고 올해 초 이사를 했는데, 우리 집 분위기가 꼭 수도원(修道院)을 닮았다. 아들과 함께 살고자 하는 욕심으로 필요이상으로 크게 지어졌는데 아들의 직장 여건상 함께 살기 어려워서 고민이 되었다. 단촐한 우리 부부가 살기에는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런데 때마침 잘 지어졌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바뀌었다.
누가 자기 합리화라고 비웃어도 좋다.
아무튼 크게 지어진 이 집이 수도원 영성(修道院 靈性)을 추구하는 하나님의 집으로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면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어느 순간 생겨났던 것이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이것 까지도 헤아려 섭리하시고 여기 이 순간까지 인도하셨는지도 모를 일이다.
교회 이름을 처음에는 말숨 문서선교와 연계하여 ‘말숨교회’라 했는데, 말숨 산문집 제8권 ‘사명이 있는 자는 죽지 않는다(부제: 병든 내 몸을 만져주신 신유의 손길)’ 추천사를 써주신 강 목사님께서 수도원 같은 교회를 만들어 보면 좋겠다는 축하와 격려의 메시지를 주셨다. 이 권면의 말씀을 생각하며 기도하다가 이왕이면 한걸음 더 적극적으로 나아가서‘말숨 수도원 교회’라고 이름을 바꾸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하자면 정면돌파를 외친 것이다.
그러나 말숨 수도원 교회 라는 이름을 쓰기에는 너무 무겁고 부담스럽지 않느냐는 이견이 있어 최종적으로는 ‘말숨 수도(修道) 교회’라 이름 짓게 되었다.
사람이 전파하는 하나님의 말씀(로고스= 하나님의 道) 속에는 하나님의 ‘영’(숨결, 호흡)이 들어있는데, 이 ‘말숨’이 내 삶에 체험되고 소화된 나의 말씀(레마)이 될 수 있도록 갈고 닦아 수도(修道)함으로서 믿음과 행위가 일치되고 실천적으로 체험되는 교회가 되고자 하는 염원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로 하나님을 목말라 사모하는 영혼 이라면 누구나 오셔서 말숨을 수도하시기 바란다. 지치고 피곤한 영혼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오셔서 맘껏 쉬면서 재충전하고, 영육 강건해지는 기회가 되어졌으면 하면서 활짝 오픈한다. 조용하고 경치 좋고 공기 좋은 이곳에 머물면서 말숨 글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병든 영혼들이 고침 받아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되고,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할 뿐만 아니라 병든 육체까지도 고침 받아 새 삶을 얻는 이적과 기사와 표적이 나타나는 현장이 되기를 소원한다. 여기서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는 이런저런 살아있는 간증 기록들이 풍성하게 쏟아져 나와서 한국교회에 그 어떤 새로운 큰 도전을 줄 수 있기를 기도한다. 여러분들의 뜨거운 관심과 사랑의 기도를 부탁드리면서.
2014. 11. 26. 말숨 수도교회 염동권 목사 올림.
여기서 진정 말숨 수도(修道)가 되기를 소원한다.
내가 성경 ‘말숨’을 읽는 것이 아닌 성경이 나를 읽어주는 영적인 독서 체험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한다. 그때 비로소 ‘네가 어디 있느냐?’ 라며 범죄한 아담에게 묻는 하나님의 음성도 들려오고, 내가 얼마나 죄인이며 유한한 존재인가를 깨닫고는 겸손한 마음을 비로소 갖게 될 것이다.
* 영적인 신비 체험들은
내적인 죄성을 정화시키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사 6:5).
* 영성화의 과정은
세 존재, 즉 하나님과 나와 악마의 존재를
깊이 경험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하나님을 체험한 만큼 나를 보게 되고
동시에 그만큼 악마를 경험하게 된다(출 9:14; 요 8:32).
* 나의 모든 것이 다 부정되어
온전히 비워지고 비워진 자리에
주님으로 채워지는 상태가
바로 주님과의 합일, 일치, 완전의 경지다.
(눅18:10-14고전15:10.눅15:18-19)
* 이 세상에 시작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시다.
이 세상에 끝이 있다면
그것도 하나님이시다.
이 세상 모든 것의 시작과 끝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계신다.
우리가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그것은 시작과 끝 사이에 있을 뿐이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계 1:8, 17-19).
*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컫는 자다.
곧 그가 자기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라는 뜻이다.
그가 나를 지으시고 만드실 때
그의 증인, 그의 종으로 성별하신 것이다.
이를 알고 믿는 자는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자다(사 43:7-10).
* 하나님을 증거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눈이 있어도 소경이요
귀가 있어도 귀머거리인 백성을
이끌어내는 하늘의 일이다(사 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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