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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나의 아내가 갑자기 내게 특별한 주문을 했다.
“목사님은 죽음에 대해서 너무 자주 말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리고 목사님 글에도 보면 죽음에 관한 글들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이제는 웬만하면 죽음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으면 해요. 듣기가 싫어졌어요. 이제부터는 글 쓰는 것도 줄이고 절대로 일 벌리지 말고 남은 생을 정리한다는 기분으로 좀 더 평범하면서도 행복하게 삽시다....”
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하고 있는 아내이기에, 나 또한 심장이 나빠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과 배려가 없으면 한 순간도 자신할 수 없기 때문에 아내의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
사실 나는 좀 이상한 버릇이 있다.
하나님과 죽음을 항상 동시에 같이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다.
마치 잘 차려진 코스요리처럼 하나님.... 하면 죽음이 따라 나오고,
죽음.... 하면 천국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과 죽음 이후의 세계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처럼 되어 지고, 죽음 이후는 내가 죽을 때도 나를 책임져주시고 구원해 주실 바로 그 하나님....하고 저절로 믿음의 고백이 따라 나온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죽음은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늘 함께 붙어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어째서 일까?
내가 목사가 되도록 충격을 주었던 최초의 사건은 친구의 억울한 죽음을 목격하고서였는데, 바로 그 때문이 아닌가 한다.
세상에서의 억울한 한을 풀어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 뿐 이라는 사실, 세상의 고통과 눈물 그리고 죽음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해 주실 분도 하나님 한 분 뿐 이라는 믿음이 그 가슴 아픈 현실을 체험한 이후 그냥 나의 신앙이 되고 말았다.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생의 나라 천국은 누구나 죽음을 몸소 겪은 후에 비로소 전적으로 새롭게 시작되기 때문에 죽음과 천국은 내게 있어 항상 붙어 다녔던 것이다.
‘죽기 전에, 더 늦기 전에’라는 제목은 대구 의료원 암 호스피스 센타 김여환 의사 선생님이 쓴 책 제목을 빌려온 것이다.
더 늦기 전에 뭘 하라는 주문인가?
5년간 암 호스피스 병동에 근무하면서 말기 암 환자 800명에게 \'사망 판정\'을 내린 그녀는 고통 없는 죽음, 죽음이 전해주는 삶의 가치를 소상하게 적은 것이 한 권의 책이 되었다.
그녀는 \"우리가 한 번은 가야 할 죽음을 더 늦기 전에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은 ‘죽음의 신이 온다는 사실보다 확실한 것은 없고, 죽음의 신이 언제 오는가 보다 불확실한 것도 없다’는 독일 격언으로부터 시작한다.
죽음의 신은 예고 없이 들이 닥쳐 소중한 것을 빼앗는 잔인하고 폭력적인 것이다. 나는 아직 젊다고, 돌볼 아이가 있다고, 돈을 벌어야 할 가장이라고,.......등 어떠한 사정도 봐주지 않는 가혹한 신이다.
밥을 먹다가, 잠을 자다가, 운전을 하다가 죽음이 가자고 하면 따라 나서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프랑스 작가 시몬 드 보부아르가 쓴 \'죽음의 춤\' 에서 \'어떤 의미에서 죽음은 잘 수용해도 폭력\'이라고 했다.
죽음에는 보통 5단계가 있는데, 환자와 가족은 죽음이 찾아오면 처음에는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의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누구나 출생의 순간부터 죽음은 찾아온다는 철학적 죽음을 알고 있지만 육신적 죽음이 찾아오면 일말의 불안이 찾아오게 된다. 즉 흔적 없이 소멸될 육신, 혼자 내던져지는 외로움, 통증의 공포, 돌아 갈 수 없는 세월에 대한 향수 등등……. 이럴 때 따뜻한 위로의 말과 스킨십은 환자에게 절망감과 외로움을 달래주는 큰 힘이 된다.
호스피스 병동에서는 ‘내일 뵐게요.’와 같은 인사는 없다고 한다.
내일을 기약 할 수 없는 환자를 보면서 오늘의 중요성을 느끼는 것이 더 중요하다. 지금에 감사 하고 평화로운 것, 최선을 다하는 것이 진짜 행복한 삶이다. 암의 고통은 산통(産痛) 이상인데 그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래서 고통을 줄여주는 모르핀은 신이 인간에게 내린 최고의 의약 선물이다. 요즈음은 모르핀 사용(97%까지 통증 완화)으로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모르핀은 중독도 없고, 내성도 없다. 아플 때마다 사용하면 쓰는 대로 효과를 나타낸다. 가격도 저렴하여 고통 없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해준다.
죽음의 신은 잔인하다는 것, 내일보다는 오늘의 삶에 더 없이 충실 하는 것이 중요함을 다시금 느낀다고 한다.
사람이 굳이 죽음을 생각하면서 살 필요가 있나. 죽을 때가 오면 죽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 라고 질문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답변은 이렇다. “자신의 마지막을 생각하면 삶의 태도가 달라진다. 내 삶도 그렇게 바뀌었다. 죽음을 배우면 죽음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삶이 달라진다. 우리는 죽음을 기억하는 가운데 하루하루를 감사하면서 현재에 충실할 때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죽음의 문턱에서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누고 화해하며, 슬픔을 애도하고 위로하는 것, 이것이 진짜 해피 엔딩한 죽음이다.
죽음을 앞두고 가족은 행복, 애정, 이해, 연민 같은 따뜻한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돈과 사랑이 빚어낸 갈등과 비극도 종종 보게 된다.
좋은 사람들이 주변에 있으면 죽음은 안식이 되지만, 재산 갈등이 있는 가족은 죽음이 비극이 되는 경우도 있다. 죽어가는 어머니 앞에서 무서운 증오를 드러내는 형제, 남매들을 보기도 한다.
어느 날 병간호를 잘 하던 딸이 오지 않는다. 암에 걸린 아버지가 유산 분배를 하면서 아들에게 더 줬기 때문이다. 마음이 상한 것이다. 죽어가는 엄마를 놔두고 자식들이 유산 얼마 때문에 여기 복도에서 머리 뜯고 싸워 경찰까지 부른 적이 있었다.
우리는 죽음에서 무엇을 배우는가?
죽음은 혼자 떠나는 것이다. 모든 걸 남겨두고 간다. 죽음의 쪽배에는 돈도, 권력도, 사랑하는 사람도 태울 수 없다. 오직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추억을 간직한 채 떠나게 된다. 죽음의 쪽배에 몸을 싣고 요단강을 건널 때 사랑하는 사람들이 옆에서 지켜봐 준다면 혼자 가는 일도 외롭거나 두렵지 않다.
추억을 회상하면 배웅해주어야 한다.
우리 삶은 갖고 가지 못하는 것들에 너무 집착한다.
마지막을 생각하면 삶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 때 훨씬 현명해진다.
중세 수도원 수사들은 ‘메멘토 모리’ 즉 ‘죽음을 기억하라\' 라고 서로 인사했다. 이처럼 자신의 마지막과 소통하는 것이다.
당신에게서 죽음은 어떤 모습인가?
죽음이 우리 등 뒤에 와 있다면 청소기가 바닥 먼지를 확 빨아 당기듯이 할 것이다. 이를 저항하는 것은 동전이 잘못 빨려 들어가 따닥따닥 소리를 내는 것과 같다. 죽음 직전의 섬망(?妄) 증세가 그런 것이 아닐까. 내가 읽은 책으로는 죽음에 대해 저항하도록 유전정보(DNA)에 그렇게 저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마지막까지 살려고 하다가 죽어 가는지 모른다.
여기 환자들은 저마다 소설책 한 권의 사연이 있다. 한 할머니는 암으로 얼굴 아랫부분이 몽땅 내려앉고 치아와 혀, 뼈가 통째로 드러났다.
내가 \'자살하고 싶지 않았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할머니는 \'남은 가족에게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에 차마 못 그런다\'고 했다. 그렇게라도 남은 자식을 배려해 마지막까지 살아가는 것이 감동적이었다.
기자가 김여환 의사에게 질문했다.
“영혼이 있다고 봅니까?”
이에 대해서 그녀는 \"죽음의 그 뒤는 모르겠다. 다만 내가 죽으면 내 딸의 마음에 살아 있을 것으로 본다. 우리 엄마도 내 마음 여기에 살아 있으니까.\" 라고 대답했다.
나는 이 대목에서 심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무언가 미흡하다는 느낌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그렇게도 예리한 통찰과 좋은 견해를 가지고 계신 의사 선생님께서 가장 본질적이고도 핵심적인 풀어야할 사안에 대해서는 정답을 피해가고 있고 여전히 놓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죽음을 받으시고 해결해주시는 종결자(終決者) 하나님이 살아계시니, 영혼은 당연히 있다고 확신 있게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한다. 만일 그렇게 말할 수 없다면 ‘죽기 전에 더 늦기 전에’우리가 해야 할 진정한 과제는 제대로 수행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오늘 아침 뉴스에 중학교 성적이 석차 상위 2% 안에 들어야 입학할 수 있는 전국적으로도 손꼽히는 경북지역 자율 형 사립고에서 전교 1등도 했던 고교생이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우리나라 경쟁교육에 시달리는 학생의 직접적이고 압축적인 유서로 보이는 권 군의 유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제 머리가 심장을 갉아먹는데 이제 더 이상 못 버티겠어요. 안녕히 계세요.
죄송해요”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만일 권 군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제대로 만났더라면 이런 비극적인 일은 결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사람은 경쟁의 압박에 못 이겨 죽고, 병들고 노환으로 죽고, 이런저런 사고로 죽고, 빚에 쪼들려 죽고, 실의에 빠져 죽는 존재다.
따지고 보면 이를 피해갈 존재는 단 한 사람도 없다.
고통과 눈물 속에서 죽어야 하는 인간의 당면한 운명 앞에 \"죽음의 그 뒤는 모르겠다. 다만 내가 죽으면 내 딸의 마음에 살아 있을 것으로 본다. 우리 엄마도 내 마음 여기에 살아 있으니까.\" 라는 심리적 위안 정도로는 죽음을 이겨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예비하신 천국의 실체에 대한 믿음만이 궁극의 소망을 줄 수 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21:1-4).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에게 진정한 위로와 평안은 살아계신 하나님과 영생의 천국에 대한 참된 소망을 가질 수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 여호와 하나님은 영원히 찬송 받으실 분.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즐거움으로 나가자(잠3:16 시18:3).
* 생존의 터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자.
생명과 구원과 하늘나라 기업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가 되자(엡3:17 딤전6:19 ,딤전3:15).
*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
시작과 끝이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세세무궁토록 영광과 찬송을 돌려 드리자(계1:17.21:6).
* 동쪽과 서쪽은 하나로 만난다.
가장 작은 자, 섬기는 자가 가장 큰 자라는 말씀은
우주의 원리와도 같다(마16:24-25.18:4).
* 하나님의 나라는 존재의 이동뿐만 아니라
존재의 변화다.
지금 여기서 하나님 나라를 살고자 하는 자,
그리고 사는 자에게 주어지는 은혜의 선물이다(눅17:21. 골3: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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