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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신학교를 가기 이전부터 영혼들을 하나님 품으로 인도하는 전도에 큰 관심이 있었다. 이 땅에 교회가 존립하는 가장 큰 이유도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이름과 구원의 소식을 전파하는 전도에 있고 교회가 해야 할 최우선 과제 역시 영혼을 구원하는 전도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씀 했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사52:7).
죄 아래 죽을 운명에 처한 사람에게 천국 은혜의 복음전파는 그 어떤 것과도 비교될 수 없는 값어치가 있다.
한 사람의 영혼은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계산 불가의 소중함 때문이다.
하나님의 절대 의와 절대 사랑이 완성되는 천국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비밀인데, 그 비밀은 전도를 통해서 공개되고 믿어져서 마침내 은혜의 기업으로 받게 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불완전한 사랑과 의가 아닌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과 의가 이루어지는 그날, 사자와 어린 양이 함께 풀을 뜯고, 독사의 굴에 어린아이가 손을 넣어도 물지 않는 ‘샬롬’(평강)의 나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그것은 인류가 오랜 세월 꿈꾸어 왔고, 꿈에서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절대 유일한 소망 그 자체다.
흔히 모든 종교의 시작과 끝은 궁극적으로 죽음의 문제가 키 워드다. 사람으로서 어떻게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죽음 때문에 종교는 시작되었고 이에 대한 해답 또한 중요 주제인 것이다. 이는 내게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고등학생 시절 나와 가장 친했던 친구가 그 어떤 이유나 잘못도 없이 억울하게 무참히 살해당하는 것을 목격한 나는 비극적인 세상의 허무(虛無)를 너무도 일찍 한 순간에 알아버리고 말았다.
만일 내가 그 친구였다면 도대체 삶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를 궁극적으로 묻고 또 물었다.
어떻게 해도 사람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세상성(世上性)의 부조리한 모순된 현실이라면 이는 어떻게 조화롭게 풀릴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는 내가 풀지 않으면 안 될 수수께끼 같은 당면 과제였다.
그런데 성경 말씀을 읽던 어느 날, 나는 요한 계시록 21장에 나오는 천국 복음의 말씀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선과 악을 하나님의 의로 심판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은혜로 주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신 사랑과 구원만이 세상의 허무와 죽음을 이기는 해답이었던 것이다.
세상 것들은 모두 하나같이 변하고 썩고 사라져가는 허무한 것들이지만 하나님 한 분만은 영원히 변치 않고 썩지 않는 진리가 되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말미암는 죄에서의 구원만이 세상의 절대적인 소망이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깨닫고 믿고 알게 되었다.
죄 아래 탄식하고 신음하는 영혼들을 하나님 품으로 인도해서 천국을 은혜의 기업으로 받을 수 있을 때만 세상의 모든 문제들이 해결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 나는 하나님이야말로 내 삶에 있어서 자나 깨나 궁극적 관심(窮極的 關心)이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여전히 만만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는 지금까지 30년 넘도록 목회를 하면서 세상성의 허무와 모순과 부조리를 더욱 체험으로 알게 되었다.
해 아래 존재하는 사람이 얼마나 죄인 된 존재인지, 살았으나 죽은 것과 거의 다름없는 비존재(非存在)의 존재(存在)에 지나지 않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Nothing)인지, 뜻은 세울 수 있으나 자기 의지대로 되는 것이 거의 없는 철저히 막히고야 마는 존재인지.... 절절히 체험하게 되었다.
사람은 운명적으로 태어날 때부터 죄 가운데 태어나 죄를 물 먹듯 마시면서 살고 그리고 마침내 죄 가운데 죽는 존재다. 갓 태어난 아기도 죽는다. 진시황제도 노환이라는 병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것은 왜 그런가? 죄 아래 있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죄가 있어서 늙는 것이고, 그것 때문에 결국은 노환(老患)이라는 병에 걸려 죽는 것이다. 죽을 만큼 외롭고 고독한 것도 하나님과 떨어져 간격이 생겼기 때문이다. 하나님처럼 완전하지 못하고 불완전하고 막혀서 죽는 존재가 바로 나 자신이다. 이처럼 세상은 운명적으로 막히는 곳이다. 돈에 막히고 병에 막히고 가는 세월에 막히고 시간과 공간에 막히고 기가 막히고 .... 결국은 막혀서 죽는 곳이 세상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구원 이외에는 소망이 없다. 이 세상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하다. 철이 없어 몰라서 그렇지 하나님이 필요치 않은 사람, 구원이 필요치 않은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다. 우리 국민 모두가 울부짖었던 세월호 참사나 아우슈비츠 같은 인류의 비극은 하나님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다. 하나님 없는 죄악 된 세상이 얼마나 무기력하고 허무하며 아무것도 아닌가 하는 것을 처절하게 획인시켜 주는 것이다.
하나님 품을 떠난 사람은 비존재의 존재에 불과하다, 이런 뼈아픈 사건을 통해서 죄 아래 있는 인간, 너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Nothing) 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사람은 뜨거운 맛을 보지 않으면 좀처럼 깨닫지 못하는 미련하고 패역한 존재다.
사람이 고통과 허무 그리고 쓰라린 실패와 죽음을 경험하고 나서야 하나님만이 절대구원이요 절대소망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믿음의 해석학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영적인 진리를 깨닫는 순간 그는 더 이상 실패자가 아니요 진리가 자유케 함을 체험하는 구원받은 하나님 자녀, 영생 천국을 기업으로 받는 복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믿음으로 세상을 보고, 이해할 줄 아는 자가 복 있는 자다. 성령의 음성을 들을 귀가 있는 자가 복되고, 영의 눈을 뜨고 밝히 하나님 우편 보좌를 볼 수 있는 자가 복되다.
나는 목회하면서 죽을병에 걸려 두 번이나 극적으로 사선(死線)을 넘어야 했다. 2001년 1월에는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뇌를 다 파괴하여 세브란스에서도 99.999 사망판정을 받고 장례준비를 하라고 했었고 2013년에는 2월과 12월 한 해에 두 차례나 심장 수술을 해야만 했는데 더 이상 목회하기가 어려워져서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내려놓아야만 했다.
가평 경치 좋은 한적한 곳으로 삶의 자리를 옮기고, 쓰고 싶은 글이나 쓰다가 하나님 부르시면 가리라 생각하고 이사까지 했다. 그러나 나를 붙잡으시는 은혜의 하나님께서 친히 나타나 병든 내 몸을 만져주심으로 말미암아 건강을 회복하게 된 나는 다시금 목회 일선으로 나서게 되었다. 내가 만나고 체험한 살아계신 은혜의 하나님을 나타내는 ‘말숨’ 글을 통해서 전도하고자 하는 소원 그 하나가 덤으로 사는 내 삶의 목적이 되었다.
세상은 정보통신의 발달로 무한대로 열린사회가 되었다. 문명의 이기(利器)를 잘 활용할 수만 있다면 전도의 능률은 극대화 될 수 있다. 하나님을 잘못 오해하고 있거나 믿음생활에 낙심한 사람들,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불신자 영혼들에게 이메일이나 카카오톡으로 하나님을 나타내는 ‘말숨’ 글을 성심성의를 다하여 보내드리고 지속적으로 기도한다면 이 또한 하나님의 훌륭한 목회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사람이 전파하는 ‘말’ 속에 하나님의 ‘숨결’(히브리어 ‘루앗하’는 하나님의 영(靈)으로 번역되었는데 원래는 숨결, 호흡이라는 뜻)이 흐르고 있는 ‘말숨’글을 통해서 천국 사귐과 사랑의 친교가 이루어지면 적절한 때에 서로 만나서 복음대화도 하고 기도도 하면서 살아있는 신앙생활로 인도할 수 있다면 이 또한 실질적인 목회의 한 역할로서 교회발전에 꼭 필요한 부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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