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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신앙의 옥석을 가리는 시금석은 순교에 있다고 할 것이다. 천하보다 귀한 것이 생명인데, 자기가 섬기는 하나님을 위하여 피 흘려 죽을 수 있다면 더 이상 내 놓을 것은 사실상 없기 때문이다. 목숨이라는 가장 큰 것을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에 순교의 열매는 그렇게도 놀라운 것일까? 교회사적으로 보면, 순교의 피는 교회의 씨앗과도 같아서 그 피가 뿌려지는 곳마다 하나님의 영광이 친히 나타나셨고, 교회가 생겨났고 또 부흥되어 오늘의 세계교회가 되었다. 순교의 발자취는 수를 다 헤아릴 수 없지만 나는 오늘 특별히 몇몇 구체적인 순교 사례를 통해 하나님은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미국의 명문대학을 졸업한 다섯 명의 젊은이가 있었다. 이들 다섯 명의 젊은이들은 에콰도르에 선교사로 나섰다. 그들은 아내들을 후방에 남겨둔 채 비행기를 타고 단 한명의 기독교인도 없는 아우카 인디언 마을로 떠났다. 1956년 1월 2일. 피트 선교사는 아내에게 긴급무선을 쳤다. “흥분한 인디언들이 몰려오고 있다. 기도해 달라.” 그 후 연락이 끊겼다. 이튿날 구조대원과 가족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다섯 명의 선교사는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었다.
나는 한 때 휴머니즘적인 색깔의 신앙을 갖았었는데, 이런 순교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보았다. “아무리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서라지만 꼭 이렇게까지 되어야 하나? 불쌍한 그 가족은 어떻게 하라고..... 하나님께서 젊은 선교사들을 좀 더 오래 살도록 배려하셔서 복음을 전파하도록 하면 안 되었을까? 그들의 참혹한 죽음은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혹시 저주 아닌가?” 등등.... 별의 별 생각을 다 하면서 고민했다. 그러나 그것은 역시 짧은 사람의 생각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언제나 하나님의 뜻과 섭리는 한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다. 순교의 피를 기쁘게 받으시는 하나님은 수많은 축복을 준비하시고, 섭리하셨으며, 거기서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생명의 열매를 거두시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역사 속에 가장 극명하게 나타내 보이셨다.
20대의 선교사 부인들은 울부짖으며 한 가지 다짐을 했다.
“남편들이 이루지 못한 선교 과업을 우리가 완수하자.”
아내들은 아우카 마을로 이사해 복음을 전했다. 40여년이 지난 지금 그 마을은 ‘복음의 땅’으로 변했다. 더욱 기이하고 놀라운 것은 선교사를 살해한 다섯 명의 인디언들 가운데 네 명이 목사가 되었고, 1천명의 주민들이 신자로 변했다는 사실이다. 이런 역사적인 결과물들은 순교의 피를 기쁘게 받으신 하나님이 친히 성령으로 나타나시고 일하시지 않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최근 피트 선교사의 부인 라이펠트 여사는 선교사들의 용기 있는 활동을 담은 「아우카 선교 이야기」 라는 책을 펴냈다.
40 여 년 전의 순교의 씨앗이 활짝 꽃을 피운 것이다.
2.
우리 한국 기독교 역사에 맹 의순 이라는 특별한 하나님의 사람이 있다. 그는 정 연희 씨가 쓴 소설 ‘내 잔이 넘치나이다’의 주인공이다. 한국의 청년 성자로 알려진 그는 음악에 천재적 재능을 가진 인물로서 평양 장대현 교회 맹 관호 장로의 아들이다. 그가 신학교 재학 중 6.25가 발발, 피난 중 북한군으로 오인되어 미군포로가 되었다. 그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목회하면서 예배를 드리고 말도 통하지 않는 중공군 환자들을 돌보아주다 석방을 앞둔 채 쓰러져 죽었다. 그는 26세라는 너무도 젊고 아까운 나이에 포로수용소의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 되었다.
그는 중공군 포로에게 전도하기 위하여 미군의 석방을 거부하였는데, 중공군 환자들을 돌보다 순교한 그의 일생은 중공군 소년병들과 환자들이 감화된 숫자를 감히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이며, 오늘 날 중국 선교에 미친 영향력은 가히 절대적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거제도 포로수용소 내 교회를 통해 성령의 큰 감동을 받고 후일 살아남은 자 가운데 목회자가 된 한국인은 수십 명에 달하고 있다.
다음의 글은 그의 도움을 받았던 중공군 포로 환자들이 그의 죽음을 추도하는 추모 글 전문이다. 이 글을 통해서 하나님은 한 사람 순교자를 통해서 어떻게 생명의 열매를 거두시고, 영광 받으시는가를 짐작케 한다.
(맹 의순 선생 영전에 드립니다)
평화의 왕자, 화평의 사도, 인애의 왕, 우리에게 사랑의 주인이셨던 맹 의순 선생이 가시다니, 오늘밤, 귀 교회에서 우리의 위로 자 였고 사랑과 존경의 표적이었던 맹 선생의 추도 예배를 드린다기에 우리 모든 사람의 뜻을 모아 서둘러서 이 글월을 드립니다. 우리는 서로 말이 통하지 않던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우리처럼 포로의 옷을 입은 그가 미국 군인 의사들을 도우며 우리의 병동을 찾아오던 초기에 우리는 그를 경멸했고 무시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늘 온화했고 우리를 돕는 그의 행동은 희생정신으로 언제나 꾸밈없이 여일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대개가 그 무엇인가에 대해서 몹시 화를 내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적이 따로 없었습니다. 나라에 대해서도 특별한 생각을 가질 줄 몰랐습니다. 그저 전쟁이라는 것에 대해서 화가 났고, 우리를 전장에 보낸 사람들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그들을 죽도록 원망했습니다.
그러한 우리들에게 맹 선생은 십자가의 도를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우리 동료 중에 글씨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까지 일일이 글씨를 가르쳐가며 선생은 찬미가를 불러주셨고 나무 십자가를 안고 다니며 그 뜻을 성심껏 전해주셨습니다.
선생은 새벽 한시, 두시면 늘 병동으로 오셨습니다. 초저녁에 치료와 간병을 맡았던 사람들이 모두 물러가고 나서 중환자들이 심하고 무거운 고통에 짓눌리는 그 시간에 선생은 고통을 다스리는 천사로 우리들 앞에 오시는 것이었습니다. 선생은 하늘이 보낸 천사였습니다. 깊은 밤 신음 소리가 낙수처럼 쏟아질 때 선생은 인자의 큰 그릇이 되어 우리들의 온갖 고통과 신음을 다 받아 담고 고통과 신음을 들어냄으로서 하나하나 편안히 잠들도록 잠재워 주는 천사로 오시는 것 이었습니다. 선생의 한 손에는 성경책이, 그리고 다른 손에는 물통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선생은 움직이지 못하는 환자를 골고루 만져주고 주물러주면서 그렇게도 간절하게 기도를 하십니다. 우리는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의 기도를 듣고 있으면 기승하던 고통이 스러지고 신음과 함께 목이 타서 잠 못 이루던 육체가 편안한 잠의 품에 안기게 되고는 하였습니다. 겨울이면 따뜻한 물로 여름이면 시원한 물로 우리들의 얼굴을 씻어 주고 손을 닦아 주십니다. 때로는 발도 씻겨 주십니다. 넉넉지 않은 수건을 정성껏 깨끗하게 빨아가며 한 사람 한 사람 고루 씻어주십니다. 선생의 손에는 신비한 힘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 손이 얼굴에 닿으면 시원하고 가벼워지는 것입니다. 선생이 발을 씻겨주시면 천상에나 오른 것처럼 평화로워지고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염치없이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그분의 손으로 씻기는 것을 바랬습니다. 선생은 우리의 더러워진 육체를 구석구석 닦아 주시면서 그 부드러운 음성으로 나직하게 노래하고는 하셨습니다. 눈을 감고 들으면 그 노래는 천사의 옷깃을 스치는 소리 같기도 했고, 천사가 안고 있는 하늘나라의 악기가 울리는 것 같은 소리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선생에게서 사랑의 신이 계시다는 것을 보고 깨닫고 알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별로 불편해 할 일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것은 잘 사는 사람 몇몇이 우리들의 기회를 다 빼앗아 저들만 기름지게 살고 우리는 가난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우리도 모택동의 깃발아래 공산주의만 잘 하면 잘 살겠다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려면 미국이나 구라파에 있는 몇몇 나라들과 싸워서 이겨야 한다는 것 뿐 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는 포로가 되었고 그렇게 되고 보니 쓰레기 같은 낡은 누더기로 무장 된 총알받이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고 붙잡혀 포로가 되고, 팔 잘린 자, 다리 잘린 자, 눈 잃은 자, 살점이 달아난 자, 동상으로 살이 문드러진 자가 되어 적군의 손으로 치료를 받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될 대로 되라는 심사와 끝없는 원망과 증오가 굳어져서 우리의 마음은 깜깜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 자리에 맹 선생이 오셨습니다. 맹 선생의 숨결은 우리의 그 두꺼운 껍데기를 녹여주셨습니다. 얼음장처럼 차고 두껍고 어둡던 그 마음의 문을 기도와 찬미와 손을 대어 만져 주던 그 사랑으로 녹게 해주셨습니다. 그 사랑의 따뜻함이 철문이 되어 단단하게 빗장 질러졌던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덥혀주시고 빗장이 풀리게 해 주셨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사랑의 시작이 예수 그 분 임을 알았습니다.
십자가는 나의 죄의 모양이고 내 죄로 해서 예수가 그 위에서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한국말을 알고 있는 동료가 그분의 말씀을 통역하거나 옮겨 베껴서 우리가 성경을 배우게 했고 찬미가도 부르게 해주었습니다.
맹 선생이 지켜 주시는 밤은 어둠이 아니었습니다. 맹 선생이 함께 하시는 밤은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선생은 우리를 공격하려는 고통을 막아 주시는 기도의 용사였습니다. 우리를 낙담케 하는 외로움을 쫓아주시던 파수꾼이었습니다.
우리는 포로의 신세가 되었을 때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하고 통탄을 했었습니다. 이 낯선 땅 엉뚱한 곳에서 우리가 왜 포로로 남겨져야 하는 것인지 기가 막힐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맹 선생과 함께 지내면서 그분께 가르침을 받은 후에 우리들 몇 사람은 기쁘고 신기한 놀라움에 이따금 혼자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합니다. 중공 땅에서 복음이 지워지고 그 담장이 하늘 끝까지 닿을 만큼 높고 두꺼워지자,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받아들일 몇 사람을 위해서 우리를 이 땅으로 밀어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전쟁의 총부리를 한국 사람에게 들이대기 위해서 온 사람들이 아니라 이 땅에서 복음의 생명수를 받아 마시기 위해서 보내어진 사람들 이었다는 것을 누가 무어라 하여도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난 8월 11일 새벽에도 선생은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몇몇 사람은 잠이 들어있었지만 우리들은 거의 다 선생께서 석방되시리라는 소문을 듣고 있었기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선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물통과 성경책 그리고 번역한 찬송가를 베껴 쓴 종이 한 묶음을 들고 오셨습니다. 깨어 있는 사람들에게 그 종이를 나누어 주시고 종이 말미에 적힌 대로 내일은 이곳을 떠나게 된다는 인사를 하셨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침대 머리에 꿇어 앉아 그 손을 붙잡고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잠들어 있는 사람에게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중 환자들 한테 가셔서는 얼굴 씻기고 발 씻기는 일을 다른 날과 다름없이 하셨습니다. 선생은 환자들을 씻겨 주시면서 베껴서 나누어 주신 찬송가를 나직하게 부르셨습니다.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하나님이 함께 계셔
훈계로서 인도하며 도와주시기를 바라네.
위태한 일 면케 하고 품어 주시기를 바라네.
주의 크신 사랑 안에 지켜 주시기를 바라네.
다시 만날 그 때까지 우리 서로 만날 때,
다시 만날 그 때까지 주님 함께 계심 바라네."
우리는 그 곡조를 배워가며 조금씩 따라 불렀습니다.
선생님은 한 사람 한 사람 중환자를 씻기시며 울고 계셨습니다.
우리도 따라 울었습니다.
전쟁이 나던 해, 그 해 초겨울부터 오늘에 이르기 까지 거의 빠지는 일 없이 이 낯설고 말 안 통하는 이국인들의 병실을 찾아 주신 분, 이제 우리가 그 분을 잃는다 생각하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선생은 석방이 되셔도 이곳에서 일 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본다고 하셨지만 우리는 암담했습니다. 마지막 환자를 다 씻기고 일어난 선생은 눈물을 씻을 생각도 하지 않고 시편23편을 우리말로 더듬더듬 읽어주셨습니다.
선생은 그 성경 말씀을 중국어로 번역해서 베껴 가지고 계셨고 틈틈이 우리에게 읽어 들려 주셨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다 봉독하신 뒤 높은 곳을 바라보시며 다시 한 번 말씀하셨습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우리는 다 그 얼굴을 바라보며 그의 말씀을 따라 외었습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그 얼굴의 화평함이 우리를 안위해 주었습니다.
그 평화의 미소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선생은 마지막 환자를 씻겨낸 물통과 대야를 들고 일어나셨습니다. 그 순간 어딘지 먼 곳을 향해 높고 높은 그 곳을 바라보며 남겨 두고 가시는 우리들을 부탁하는 듯 높은 곳을 바라보시던 그대로 그 자리에 쓰러지셨습니다. 미국인 의사들이 달려오고 앰불런스가 와서 선생을 실어간 뒤 우리는 자책하며 울부짖었습니다. '염치없는 우리들이 선생의 생명을 빼앗았다.
우리가 선생을 돌아가시게 했다.'고.
그 아침이 다 밝아 일과가 시작되었을 때 우리는 선생께서 우리에게 전해 주신 사랑의 신 예수께 간절하게 눈물로 기도했으나 우리에게 전해진 것은 선생이 운명하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통곡합니다. 우리는 모두 통곡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맹 선생을 만나기 위해서라도 예수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어쩌면 맹 선생은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 이 세상을 떠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십자가의 길 위에서만 우리는 맹선생과 함께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디에 있든지 어디로 가든지 맹 선생이 주신 그 사랑을 키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그 씨앗을 뿌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통곡합니다. 우리는 통곡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버려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맹 선생과 함께 주님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통곡합니다.
거제리 포로 수용소 중공군 병동의 환자들 일동
눈물 없이는 차마 읽을 수 없는 추모 글이다.
맹 의순 선생의 영적 감화력이 얼마나 컸으면 이방인이나 다름없는 중공군 포로들이 복음의 진리를 그렇게도 정확히 깨닫고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이들이 세상에 나가서 제자도의 역할을 어떻게 하게 될지도 믿어 의심치 않게 되는 것이다.
3.
순교는 마치 먹히면서 먹는 낚시의 원리와 같다.
미끼를 먹으면 자신이 잡혀 먹힌다.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여기에 들어있다.
순교자의 길은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과 일치하는데, 이는 구약성경의 고난 받는 종의 예언과 동일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고난의 길,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을 통하여 구원의 역사는 이루어진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타종교와는 비교될 수 없는 탁월한 진리임이 바로 여기에서 확증된다.
한국 기독교회의 순교 역사는 이를 증명해 준다.
주 기철 목사나 손 양원 목사 같은 순교자들의 흘린 피가 밑거름이 되어 한국 기독교는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다.
손 양원 목사는 1948년 여수·순천사건으로 두 아들을 폭도들에 의해 잃었으나, 사태 진압 후 가해자들의 구명(救命)을 탄원하여 원수를 양자로 삼음으로써 세상을 감복시켰다. 그는 6·25전쟁이 일어나자, 동료와 신도들의 피난 권유를 거절하고, 행동이 부자유한 나환자들과 교회를 지키다가 공산군에 의해 총살당했다. 그는 목사가 된지 4년 만에 그가 섬기는 신앙 때문에 죽임을 당했으니 인간적으로 볼 때는 한없이 아쉽고 안타깝고 억울하고
서글프기까지 하다. 그러나 순교의 피를 기쁘게 받으신 하나님은 그의 죽음이 결코 헛된 희생이 되지 않도록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길이길이 남을 놀라운 영적 감화력을 한국교회에 선물하심으로 수많은 영혼들이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도록 섭리 하셨다.
4.
하나님 품을 떠난 악한 세상은 의로운 자를 까닭 없이 욕하고 핍박하고 미워한다.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한다.
그것이 바로 악한 영들이 활동하는 무서운 세상 성(世上 性)이다. 어두움은 빛을 미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代贖)의 희생을 통하여 하늘과 땅이 화해를 이루고, 마귀를 멸하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사용하시고, 마침내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지혜요 창세전에 계획하신 하나님 은혜의 경륜(經綸)으로 작정 하셨다.(엡3:2)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요12:25)
이는 곧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요, 살고자 하는 자는 죽으리라는 것이다. 약탈하고 빼앗으러 오는 자들에게 저항하지 말고 그냥 내어주라는 것이다. 칼을 쓰는 자는 결국 칼로 망하기 때문이다. (마26:52)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며, 겉옷을 달라 하는 자에게 속옷까지 내어주고, 원수를 저주하지 말고 위하여 기도하며 사랑하라는 예수님 말씀은 순교의 정신과 같은 것이다. (마5:38-48)
저항하지 말고 얻어맞고 내어주고 당하라는 것은 세속적인 사고방식에 익숙해 있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논리다. 세속적인 사람에게는 말도 되지 않는 헛소리로 밖에는 들려지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를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씀한다. (고전2:7)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다는 것이다.(고전2:6-10)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시대에 무저항으로 그냥 내어주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 사람의 눈과 판단력으로 본다면 전혀 불가능한 일이며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인 신 사고(神 思考)로 본다면 가능성이 있다. 하나님은 그 언제나 불가능의 가능이시기 때문에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난다. 먹히면서 먹는 법, 먹히는 자가 먹는 자가 되고, 먹는 자가 먹히는 자가 되는 법이다.
바로 이것이 약육강식이라는 악마적인 세상을 정복하는 하나님의 전략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를 죽기까지 낮추고 섬기며,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져야만 한다. 그리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끝까지 참아야 한다.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식은 이런 것이며, 순교자의 길은 그 언제나 등경 위의 등불처럼 가장 높은 산꼭대기에 서 서 어두운 세상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 예수님의 복음은 해방의 복음이다.
죄로부터 마귀로부터 온갖 비인간적인 질곡으로부터
궁극적으로는 죽음으로부터의 완벽한 해방이다.
(눅4:16-19 히2:14)
* 하나님은 세상이 예수 안에서
하나 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말이 다르고 민족과 문화가 달라도
하나님 주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서로 한 가족이 되어
화목하게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요17:11)
* 하나님께서 내 삶에 오시면
슬픈 눈물도 기쁨의 강으로 변하고
화(禍)도 복으로 바꾸어진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는 강이 변하여 광야가 되게 하시며
샘이 변하여 마른 땅이 되게 하시며
그 주민의 악으로 말미암아 옥토가 변하여 염전이 되게 하시며
또 광야가 변하여 못이 되게 하시며
마른 땅이 변하여 샘물이 되게 하시고....(시107:31-39)
* 천지 만물이 모두 다 하나님의 것이다.
내가 하나님 안에 있으면 모든 것이 다 내 것이 된다.
하나님처럼 마음을 넓히고 크게 하는 자,
은혜를 은혜로 받고 모든 것에 주인이 되어
부요한 자가 된다.(고전8:5-6)
*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로 말미암아
우리를 받으셨으니 우리도 서로 받으라 말씀하신다.
이는 서로를 존재로부터 긍정하고
강한 자는 연약한 자의 약점까지도 담당하는
적극적인 선한 삶이다.(롬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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