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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은 다시 수정보완 되어 최종 원고가 만들어졌습니다.
여러 곳을 고쳤고, 문맥 표현을 새롭게 했으며
특히 삶의 고난에 대한 신앙적인 의미를 첨가 했습니다.
이미 읽으분 분들은 처음부터 다시 한번 더 읽고
음미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사랑하고 존경하는 박남일 목사님
아래의 원고는 어제 하루 꼬박하고 오늘 새벽 1시까지 쓴 초고 원고를
오늘 새벽에 일어나 수정보완하여 방금 완성했습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썼는데 수정사항 있으면 지적해 주십시오.
이 글이 제대로 쓰여졌는지는 모르겠으나
모든 이의 마음을 움직이는 글이 되었으면 하고 기도합니다.
수정판이 나올 때 첨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도 승리하십시오.
* 아래의 글은 남원 상동교회 부흥집회를 인도하고 난 후
박남일 목사님의 목회와 상동교회에 감동되어
이를 소재로 글 한편 써서 올려드린 것입니다.
죽어가는 오늘의 교회를 살리는 경종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도 하나님 도우시는 은혜로 승리하십시오.
* 본 글은 사명이 있는 자는 죽지 않는다(부제: 병든 내 몸을 만져주신 신유의 손길)
말숨 산문집 제 8권 수정증보판에 첨가될 원고입니다. 기도부탁합니다.
감사합니다.
말씀의 빛 교회 염 소망 목사 올림.
사명의식 하나로 우뚝 선 신앙의 거목(巨木) 박남일 목사
1. 남원 상동교회 부흥성회
2015년 을미년 새해 첫 달도 막 지나가려던 어느 이른 새벽이었다.
전혀 뜻하지 않은 전화가 걸려 와서 무슨 일인가 싶어 긴장했다.
“염 소망 목사님(구명: 염동권)! 잘 지내셨습니까?
저는 남원 시골에서 목회하고 있는 상동교회 박남일 목사입니다.
방금 목사님이 보내주신 메일 편지 ‘말숨’ 글을 읽고 성령님의 뜨거운 감동이 와서 이른 새벽이지만 실례를 무릅쓰고 즉각 전화 올립니다.
저는 목사님이 꾸준히 보내주시는 ‘말숨’ 글에 은혜를 받고 성령님의 감동하심을 느끼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저희 교회가 새해 들어 심령부흥 성회를 준비하고 있는데 목사님을 꼭 한번 모시고 싶습니다. 저희 상동교회는 비록 먼 곳에 있는 작은 시골교회이지만 오셔서 2월1일 주일 저녁부터 수요일 밤까지 목사님이 만나고 체험한 하나님에 대해서 간증설교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남원시에서도 좀 떨어진 곳에 위치한 저희 상동교회는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150여 성도님들이 굳건히 자리를 지켰고, 시골교회 치고는 제법 큰 교회였습니다. 남원 시내에도 젊은 성도님들 20-30 세대가 있어서 목회가 활기차고 재미도 있었는데 세월이 흐른 지금, 젊은이들은 하나 둘씩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떠났고 지금은 70여 성도님들만이 교회를 지키고 계시는데 늙고 병든 노인 분들이 대부분 입니다. 그러니 아무 부담 갖지 마시고 편한 마음으로 오셔서 쉽게 말씀 증거 해 주실 수 있습니까? .....”
나는 즉석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같이 부족한 사람을 천국잔치에 초청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여 기도로 준비하겠습니다.”
내가 박남일 목사님을 처음 만난 것은 1981년도 한신대학교 수유리 캠퍼스에서 였다. 졸업을 앞두고 있던 나는 강원도 인제 출신의 장애인 신학생이 한신대학교 총학생회장(1982년)을 맡고 있다는 말에 같은 강원도 사람이라서 그런지 그 어떤 자랑스러운 쾌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어떤 인물인가 싶어 궁금했는데 마침 만나게 되니 무척 반가웠다. 서로 만난 우리는 신앙과 시국 정치에 관한 대화를 진지하게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당시 전두환 군부독재가 철권정치를 하고 있었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교회는 어떻게 책임 있는 삶을 살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 시대의 화두(話頭)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는 왼손이 없었고 게다가 오른쪽 눈마저 실명상태였다.
그는 이런 장애인 신학생이었기 때문에 짠한 마음에 특별한 연민의 정을 느꼈고,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언제 어쩌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마음에 상처가 될까봐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속으로 안타까운 걱정만 하고 있었다.
“이 후배가 어수선하고 살벌한 이 시대에 한신대학교 총학생회장직을 맡고 있으니 민주화 운동이다 뭐다 하면서 제대로 졸업이나 할 수 있을까? 혹시 시대의 사명감 때문에 옥고(獄苦)를 치르게 될지도 몰라. 그러면 어쩌지 어쩌지?”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여러 번의 위기를 맞아 안기부의 추적을 피해 도망을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무사히 한신대학교를 졸업(1984년)하고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까지 졸업할 수 있었다(1987년 조직신학 전공).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고 신학 3학년 때는 길음동에 있는 양광교회 전도사로 일하면서 목사안수를 받기 전까지 줄곧 양광교회에서 헌신했다. 기개 있는 순수한 인품과 실력을 겸비한 그는 양광교회에서 믿음 좋고 성품이 착한 처녀 민흥기(22세) 양과 만나 마침내 사랑의 꽃을 피워 결혼한 후 처음 목회지로 부임한 곳이 바로 지금의 남원 상동교회다.
2. 박남일 목사님의 유년시절과 하나님 체험
박남일 목사님은 1958년 6월 24일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진다리라고 하는 두메산골에서 가난한 불신자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하루 먹을거리를 걱정해야 하는 가난한 가정에 집도 땅도 없어 남의 일을 해주고 살아가는 아버지와 어머니였다. 가난에 견디다 못한 아버지는 누나와 여동생 3남매와 어머니를 남겨두고 돈 벌어 온다고 하며 집을 나가신 후 8년 동안 연락이 없었다. 어머니는 3남매를 데리고 친정 근방으로 이사 와서 남의 집 셋방신세를 지며 우리를 키우셨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추억이 별로 없다고 한다. 초등학교 가면 다른 아이들은 아버지를 말하는데 그는 아버지를 말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막연히 아버지가 돈을 벌러 갔는데 돌아오면 우리도 쌀밥 먹고 고기 국물도 먹을 수 있다는 희망을 말해 줄 뿐이었다. 활달하게 뛰어 놀다가도 ‘아버지 없는 자식’ 이라는 말을 들으면 괜히 우울해졌다.
어린 시절 먹을 것이 없을 때 남의 집 먹다 남은 밥을 얻기 위해 구걸했던 때도 있었고, 모내기철이 되면 일찍 학교에서 돌아와 남의 집 모내기 심부름, 이를테면 모를 날라주거나 못줄 잡아주기 같은 일을 해주고 먹다 남은 일꾼들의 밥을 얻어먹었던 기억이 난다고도 했다.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고, ‘나는 빌어먹고 사는 놈이다’라는 말이 실감난다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도 목사가 되어 하나님께 빌어먹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눈물의 빵을 먹어 보지 못한 자와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이 있듯이 어린 시절 늘 배가 고팠고 모든 것이 충족되지 못한 유년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죄 아래 운명적으로 태어나 주어진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가를 그는 너무도 일찍이 온 몸으로 알아버린 것이다. 다행히 그는 어릴 때부터 활동력이 있어서 운동을 좋아했고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잔병치레 없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었다.
그런데 1968년 2월, 열두 살 때 폭발물 사고로 그의 삶에 큰 전환점이 일어났다.
두명의 남자 친구와 여자 후배가 6.25 전쟁 때 땅에 묻혀있던 무기를 두드리면서 장난질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피식 치익’ 하면서 연기가 났다.
위험을 직감한 그는 재빨리 뺏어 왼손으로 잡고 던진다는 것이 그의 손에서 펑하고 터졌다. 불운이었다. 이 사고로 그는 왼손과 오른 눈을 크게 다치고 말았다.
강원도 두메산골에서 일어난 뜻하지 않은 이 사고는 교통이 발달되어 있지 않아 생명이 촌각에 달렸다. 그런데 모르는 동네 아저씨가 피 묻은 그를 들쳐 업고 달려서 가까스로 목재 실어 나르는 트럭을 만나 70리 길의 읍내에서 급하게 수술하여 살아나게 되었다. 그런데 수술비도 없고 열악한 의술 환경과 너무도 어려운 상황에 그는 왼손을 절단하게 되었고 오른쪽 눈도 실명하게 되었다.
다른 친구들은 모두 무사했지만 그는 한순간에 귀중한 신체의 일부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지금까지 50년 장애를 안고 살아야 하는 뼈아픈 삶은 이렇듯 어이없게 시작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품을 떠나 죄 아래 존재하는 운명적인 세상 성(世上 性)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게 볼 수 만은 없다.
고난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신학이 밝혀내고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다.
목사는 다른 직업과 달라서 고난의 문제를 존재의 본질에서부터 이해하고 터득할 수 있어야만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그의 남다른 삶의 고통과 시련의 체험은 어쩌면 그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하나님의 섭리 아니었을까 생각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종으로 귀히 쓰임받는 하나님의 작품들은 흔히 그런 식으로 빚어지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남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이 희생되어졌다는 이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제물(代贖祭物)의 의미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인데, 어쩌면 삶의 아름다운 궁극(窮極)의 꽃을 피우기 위해 그의 고난으로 가득 찬 목회자의 일생을 예시(豫示)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이렇게 다쳐 있는 상황에서 8년 전에 집을 나가신 아버지께서 고향집으로 돌아오셨다. 그 이후 그에게는 4명의 동생들이 더 태어나게 되어 그의 형제는 7남매가 되었다. 이런 복잡한 상황에서도 그는 학교생활에 충실하며 열심히 공부하여 중. 고등학교를 좋은 실력으로 다니게 되었다. 마침내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여 법학을 공부하려는 꿈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병환과 갑작스런 죽음으로 모든 꿈은 좌절되고 낙심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답답한 처지에서도 그의 인생에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던 것은 1977년 2월부터 동네에 있는 귀둔 감리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것이 그것이다. 교회에서 싹튼 하나님 신앙의 끈이 그를 절대 절명의 순간마다 붙잡아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어렴풋이나마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 그러나 깊은 영적인 은혜의 세계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여전히 그에게 부딪혀 오는 인생의 의문들은 여전히 좀처럼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것이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자기를 왜 이렇게 고장 난 사람으로 만들어 놓고 무엇을 하시려는지 해답을 찾지 못해 더욱 힘들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농사일과 약초장사 그리고 저녁에는 고등학교 다닐 때 쌓아둔 실력으로 군부대 자녀들을 과외지도하며 교회생활도 열심히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는 사람의 의지로 하는 것이었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치 못하고 습관대로 교회생활을 하는 것에 불과 했다.
그러고 보면 성령체험으로, 몸으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후일 그는 절실히 깨닫게 된다. 성령의 체험적인 신앙 아니고서는 요동치는 세상에서 반석위에 선 믿음을 갖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흔들리는 믿음때문에 그는 여전히 죽을 만큼 외롭고 쓸쓸한 고독감에 사로잡혀야 했고 너무도 삶이 힘들 때면 자살을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이렇게 살아서 무엇 하는가?” 하는 허무한 생각이 들어 1979년 1월 캄캄한 밤에 동네 뒷동산에서 자살 하려는 생각으로 농약을 갖고 봉우리에 올라갔다. 1월이니 살을 여미는 추위였지만 눈은 오지 않고 있었다. 농약을 마시려는데 지난날 자기가 도무지 살수 없는 가운데서도 가까스로 살아 난 것과 어머니와 그리고 동생들 생각이 나면서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 졌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 하나님! 살려주세요!”부르짖으며 외치기 시작했다. 얼마나 울고 또 울었는지 정신이 몽롱해질 때 작은 콩 알 만 한 불덩이가 멀리서 나타나더니만 점점 가까이 다가오면서 큰 불이 되어 그를 덥쳤고 자신의 입속으로 삼켜지는 것이었다. 그 순간 그는 의식을 잃고 말았다.
얼마 후 그를 부르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 음성은 그가 평소에 좋아하고 믿고 의지했던 바로 그 말씀, 이사야41장 10절이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러한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깨어나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온통 온 세상에 눈이 내렸는데 놀라운 것은 그의 주위 반경 1미터에는 얼마나 헤매고 부르짖었던지 눈이 다 녹아 있었다. 그 순간 그의 마음에 강 같은 평화와 새 힘이 넘쳤다. 산 아래 동네의 교회 십자가가 그의 눈에 들어 왔다. 새벽이었다. 그를 고쳐 살려주시고 만나 주신 하나님께 그는 감사 찬송을 올리고 또 올리며 기쁨의 춤을 덩실 덩실 추었다.
산을 내려온 그는 예배당으로 가서 365일 새벽 작정기도를 시작했다.
마른 막대기를 들어 쓰시고, 쓸모없는 돌들로 외치게 하시는 하나님은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을 들어 쓰시는 분임을 깨닫고 그는 1980년 3월 한국 신학대학에 입학했다. 자신은 감리교회를 다니고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교파 같은 것은 관심 밖이었고 다만 신학 교수가 되려면 학문적인 우위에 있는 한신대학교를 가는 것이 좋다는 소문을 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신비한 영적인 체험은 두고두고 그의 평생에 목회를 이끌고 나가는 밑바탕 힘이 되어주었고, 위기의 순간에도 그를 다시금 일으켜 세워주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는 한국 신학대학에 입학하여 고난 받는 민중에 대해서 깊은 이해를 가지게 되었고 동시에 십자가의 신학을 배우게 되었다. 가난하고 헐벗고 병든 자 소외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야함을 깨닫게 된 것이다. 1984년 학부 졸업과 더불어 신대원을 공부하면서 서울 양광교회 전도사(당시 담임목사: 김복기 목사)로 사역하였다.
그리고 민중들의 아픔을 깊이 알고 싶어서 1985년 당시 구로공단지역에 개척교회이고 민중교회였던 사랑교회(당시 담임교역자: 김광훈 목사)를 평일에 틈만나면 찾아가서 봉사하고 섬겼다. 그러다 1986년 9월 5일 가난하고 소외된 농촌교회인 현재 시무하는 남원 상동교회에 부임하였다.
3. 남원 상동교회의 역사는 곧 신앙의 거목 박남일 목사의 생애다.
남원 상동교회는 1955년 3월 15일 남원제일교회의 개척지원을 받아 시작되었는데 도무지 교회 공동체가 꾸려지지 않아 전북노회에서는 폐 교회 수순을 밟고 있던 중이었다. 교회 재산이라고는 땅도 교회 건물도 없었다. 빌린 남의 땅에 대충 지은 무허가 건물이 전부였고, 남자 성도는 아예 없었고, 15명 정도의 교인들이 모이고 있었다(제직은 7명). 헌금이라고 해봐야 일년 총 결산액이 고작 140만원 정도에 불과한 열악하기 이를 데 없는 교회였다. 교회 형편이 이러하니 그 누구도 지속적으로 목회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뜨거운 성령의 사람, 박남일 목사님과 민흥기 사모님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용감한 개척자였다. 그야말로 맨 땅에 헤딩하는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돈도 명예도 아무것도 없었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라는 하나님의 비밀이 있었다. 무쇠도 녹일 영혼 사랑과 하늘이 듣는 기도 그리고 자기를 희생하는 헌신으로 전도하고 가르치고 또 가르쳤다. 이런 그에게 성령님의 아낌없는 후원하심은 당연한 것이었다. 예수 이름으로 병든 자를 안수기도하면 치유의 이적이 나타나고는 했다.
그는 가난하고 병들고 배울 기회를 얻지 못한 동네 주민들을 품기 위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다 찾아서 했다. 한글학교를 세워 글을 깨우치고, 불우한 노인을 섬기기 위해서 무료급식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노인선교를 위하여 노인대학도 만들었다. 그는 농민운동과 사회변혁 의식화 운동에도 뛰어들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에 온 정열을 바쳐 최선을 다해 보았지만 교회는 더욱 어려워져 감을 깨닫고 자신의 마음을 치며 하나님 앞에 회개 기도하다가 10년 전 신학교 가기 전에 체험했던 성령의 불을 다시 경험하게 되었다. 이러한 영적인 체험을 계기로 하나님의 뜨거운 영성을 다시 회복하고 성령운동에 매진하니 그때부터 교회가 부흥되어 가기 시작했다. 여러 교회에서 부흥회도 인도하게 되었고,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자신을 통해 하나님을 증거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병을 고치는 신유(神癒)의 은사도 허락하셨다. 성령님이 도우시는 이러한 목회활동에 힘입어 그는 1991년 9월에는 사택을 건립(22평)했고, 1994년 11월에는 성전을 건축(110평)했다.
그리고 2008년 11월에는 재가 노인 복지관을 건립(85평)하기에 이르렀다.
그 외에도 한글학교, 이웃 집수리 해주기, 노인대학, 노인복지센터, 캄보디아 단기선교도 했다. 이러한 목회사역을 통해서 은혜의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치유(治癒)의 역사를 놀랍게 나타내 주셨다. 한마디로 모든 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다.
이를 계기로 수많은 불신자가 주님 품으로 돌아왔다. 자살하려는 자가 마음을 돌이키고, 간질환자의 더러워진 영도 쫓아냈다. 담석증과 장 천공환자, 좌골신경통, 위암환자, 정신 질환자 등등 각색 병든 자들이 치유 되었고 수많은 하나님의 살아계신 능력의 역사를 보여 주셨다. 그는 부족한 종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를 겸손으로 증거하기를 원한다. 자기는 부족하지만 자기를 들어 쓰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부족한 종을 통해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만 있다면 그 무엇인들 마다하겠는가" 라고 그는 힘주어 말한다.
그는 아무런 욕심이 없다.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께만 영광 돌려드리기를 소원하는 것, 그것 뿐 이다.
사도 바울은 몸의 가시를 위해 3번씩이나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지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는 응답을 받고 가시가 은혜임을 깨달아 알고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친 것처럼 그는 몸의 가시를 평생 안고 살면서도 하나님의 불을 받은 이후에는 불평하고 원망해 본적이 없다고 말 한다. 오히려 그 반대로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가시를 주신 까닭은 자만과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임을 고백하고 있다. 만약 하나님이 자기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지 않았다면 지금 멸망의 도가니 속에서 세상쾌락과 향락에 빠져 신음하는 연약한 존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있는 육체의 가시를 감사하며 자만하지 않고, 생명이 다할 때 까지
진실 되게 뜨거운 열정으로 사명을 감당하고자 하는 소원이 생겼으니 얼마나 감사 한가 라고 고백 하기까지 한다.
또 다른 한편,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 닦았다.
2008년에는 사모님과 함께 송원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하고 사회복지사가 되었다. 자기를 비운 한 사람의 열정과 헌신은 눈부시기 이를 데 없는 업적을 남긴다는 것을 그는 여실히 보여주었다. 현재 그는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운영위원과 전북동 노회장으로 있으면서 최근에는 사회복지 법인 한기장 복지재단 이사회 이사로 선출되었고, 기장총회 부흥 선교단 공동단장으로 기장 및 초교파 부흥집회를 120여회
인도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기 몸을 날려 헌신하면 기적이 일어난다.
성령에 기초하면 불가능은 없다.
그 누구도 시골교회라고 목회가 안 된다고 말하지 말라.
나 같이 고장 난 장애인 목사, 그것도 쓰레기처럼 거덜 난 인간 패잔병도 긍휼히
여기시고 들어 쓰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근본이 소망의 하나님이시다.
'말씀의 빛' 교회 염 동권 목사님과 한옥순 사모님을 보라!
염 목사님이 의학적으로 죽음을 경험할 때 '사명이 있는 자는 죽지 않는다'는
믿음과 소망을 갖고 기도 했을 때 죽은 자도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불러내시는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온전히 소생케하는 은혜로 살려 주셨다.
이를 계기로 아예 이름도 염 동권을 염 소망으로 개명하셨다.
이렇듯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마인드는 영성을 회복하는 성령운동의 기초다.
성령 충만이 결여된 사회변혁 운동은 그 한계가 자명하다.
교회와 우리 사회가 살려면 먼저 성령님을 통해서 심령이 변화되고 부흥되어야만
한다. 하나님의 영적 체험은 갖가지 성령님의 선물 곧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치유의 역사가 나타나게 한다. 불모지에서도 들어 쓰시고 마른 막대기를 들어 쓰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매일 매일 승리하며 살아갈 때 거기서 설교의 힘도 솟아나고 목양(牧羊)의 지혜도 얻게 된다. 말하자면 내 삶과 내 몸에서 하나님이 능력으로
나타나 주시는 것이다. 그럴 때만 강퍅한 성도님들도 눈물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고 천국복음은 전파될 수 있다.
하나님은 이름없는 무명인(無名人)을 들어 쓰시는 하나님이시다.
나는 염 소망 목사님이 상동교회 집회에 오셔서 말씀 중에 흘리신 눈물을 이해한다.
나는 고장 난 인간, 마른 막대기만도 못한 나를 만나주신 하나님을 오늘도 온 몸으로 증거 하고자 한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5-29).】
참으로 그렇다. 하나님은 사람을 쓰실 때 온전히 자아가 깨어지고 부서진 사람을 쓰신다. 지금까지 박남일 목사님과 운명을 같이 한 상동교회는 60주년을 앞두고 있는데 진실로 눈물겨운 세월을 느끼게 한다. 박남일 목사님의 그 출중한 기백과 실력 그리고 인품(人品)을 두고 보면 목회지를 몇 번 옮기고도 남을 법 한데 아무런 사심이 없는 그는 불모지나 다름없는 이곳 시골교회 현장을 단 한 번도 떠나지 않았다.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물다. 모든 목회자들이 거울 삼아 본받지 않으면 안될 귀감사례(龜鑑事例)가 아닐 수 없다. 인간적인 면에서 볼 때 아쉽고 아깝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런 정직하고 진실되고 유능한 목회자가 좀 더 큰 교회로 가서 좀 더 큰 영향력을 끼쳐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짧은 사람의 생각일 것이다. 오늘 날 목회자들 세계에서조차도 출세욕에 눈이 먼 세상처럼 오지나 마찬가지인 이런 소외된 임지는 철새처럼 거쳐 갈 뿐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지배적인 통념처럼 되어버렸다. 이는 심히 안타까운 일이요 일종의 정신적인 타락이라고 보아야 맞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황무지나 다름없는 상동교회에 와서 동안(童顔)의 청년시절부터 중년을 넘어 노년기로 접어드는 이 순간까지 한 눈 팔지 않고 상동교회를 살리고 섬기는데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헌신했고, 그 결과 지역사회에 깊이 뿌리박은 건강하고 자랑스러운 오늘의 상동교회를 일구어 냈다.
남원시 주생면 상동리 시골동네에 들어서면 가장 크고 반듯하게 지어진 제일 좋은 건물이 우뚝 서있는데 그것이 상동교회요, 재가 노인복지 센터다.
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아름다운가!
도시의 개척교회 성공사례는 수많은 사람들 입에서 회자(膾炙)되기도 하고 때로는 칭찬과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세속적인 가치관과 물량주의가 빚어낸 허구적인 환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도대체 목회의 성공기준이 무엇인가? 웅장한 건물이나 사람이 얼마나 모이느냐에 달린 것인가? 우리는 본질적인 차원에서 볼 것을 보고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 좋으신 하나님께서 이곳을 거룩하게 구별하시어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과 눈을
이 성전에 두시고 항상 지켜보시면서 부르짖는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집인 것이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시골교회 현장에 사명의식 하나로 우뚝 서서 신앙의 거목(巨木)이 되신 박남일 목사님!
그의 헌신적인 거룩한 생애는 곧 상동교회의 역사와 다름아닐 것이다.
그는 우직하게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한 평생을 초야에 묻혀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이 됨으로서 상동교회는 그 값진 사랑의 수고와 피눈물을 먹고 자랐기 때문이다.
상동교회와 지역주민들은 박남일 목사님을 말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 이 지역 구석구석에 그의 애환이 담긴 눈물의 기도와 사랑의 흔적이 아로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신앙의 거목이 된 그의 목회 여정은 오늘의 한국교회를 일깨우는 경종이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이것이 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와 우리 교회들에게 주시는 귀한 메세지가 아닐까 한다.
나는 심령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어느덧 머리가 희어지고 주름살이 깊어져 가는
목사님의 얼굴에서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하나님의 권위를 느꼈다.
그것은 마치 상동 시골마을을 지켜내기라도 하는 듯 그 오랜 세월 양 갈래 길 한가운데 우뚝 서서 삶과 역사의 진실을 알려주는 오래된 거목(巨木), 바로 그것이었다!
30여년 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 상동교회 한 교회만을 섬기면서 살아오신 신앙의 거목(巨木) 박남일 목사님! 당신은 식어져 가는 한국교회에 살아있는 영성을 불어넣고 싶어서 성령운동의 꿈을 지금도 꾸고 있습니다. 비록 시골에 있는 작은 교회이지만 치유 영성 센터를 건립하고자 하는 진실하고 절실한 소원을 갖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영성회복 운동만이 오늘의 죽어가는 교회와 사회를 살릴 수 있다는 하나님의 영적 체험이 목사님에게는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거목이 되신 사랑하고 존경하는 박남일 목사님!
부디 남은 목회 사역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어 하나님의 위로와 생명과 평강이
넘치는 행복한 목회되시기를 두 손 모아 빕니다.
감사합니다. 모든 영광 하나님께 돌려드립니다.
2015. 2. 8. 주일 새벽에. 염 소망 목사.
*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벧전5:2-4).
* 하나님께 은혜 볼 것을 믿으라.
강하고 담대하며 하나님의 얼굴을 항상 찾으며
여호와를 바라라(시105:4 수1:5-9).
* 내가 삶의 혹독한 시련을 맞았을 때,
죽음 앞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이 나를 특별히 만져 주셨다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난다(마9:20.마17:15-18).
* 하나님은 우리에게 해요 방패이시다.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신다. (시84:11)
*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아끼지 않았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모든 것을 다 주셨다.
(창22:12-18 히1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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