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_자유게시판
* 말숨 문서선교회(malsum-sdm.com)에 오시면 모든 ‘말숨’ 글을
보실 수 있고 활용하실 수 있습니다.
살아서 사는 삶을 살라.
한국야구가 미국에 진출하여 재미를 톡톡히 보고 있다.
박찬호에 이어 류현진, 추신수 등이 이름을 날리고 있는데, 추신수는 그 몸값이 연봉 1천만 달러, 장기계약일 경우 1억 달러를 넘게 될지도 모른다고 한다. 누구는 뼈가 빠지게 일해도 하루 밥 세끼 먹기에도 힘겹고, 누구는 심심풀이 땅콩처럼 삶에 재미를 더해주는 공 몇 개 잘 친다고 천문학적인 대우를 받는다.
악성(樂聖)이라 불리는 루트비히 반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은 인류에 남긴 유산이 너무도 커서 가늠하기 조차 어려울 정도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평생 가난에 쪼들려 살아야 했고, 게다가 병에 시달렸고, 자존심이 유달리 강했던 그는 이런 핸디캡 때문에 결혼조차 하지 못한 채 일평생 고독을 씹으며 그 모든 것을 작품에 녹여내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만약에 그의 모든 작품들의 저작권을 장사가 최고도로 발달된 오늘 날 이 시대에 경매 부친다면, 도대체 그 가치가 얼마나 될런지 계산하기 어려울 정도라고 한다.
그의 불운은 과연 시대를 잘못 태어난 죄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
이런 것이 세상인데 우리는 과연 여기서 무얼 느끼며 살고 있는가?
아무튼 나는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이런 것이 세상적인 가치 기준이고 물질이 주는 허(虛)와 실(實)의 불공평한 단면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째서 사람들은 여전히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가치에 목을 매고 울고 웃어야 하는지, 심지어는 남의 목숨까지 해치고 죽이는 일에 몰두하고 있는지 한심하고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삶의 진정한 가치는 무엇인가 하고 진지하게 되묻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눅12:4)’
우리가 혼탁한 세상을 살면서 행복을 잃지 않으려면 참으로 두려워할 것이 무엇인지, 어떤 것에 내 목숨을 걸 수 있어야 할지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피상적으로 알고 있을 뿐 그 이면에 숨겨졌던 베토벤의 생애는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줄 뿐 만 아니라 그 어떤 도전 마저 준다.
베토벤은 실로 음악을 통해서 인생에서 도를 닦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의 음악은 우선 인류애와 도덕성에 단단히 기초하고 있는데, 이러한 특성들은 다른 음악가들에게서는 좀처럼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 사례다.
그는 단순히 음악적 재능만으로 불후의 작품들을 남긴 사람이 아니었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고뇌 한가운데서 그의 삶과 재능이 함께 어우러져서 빚어진 작품들이었기에 그는 마침내 악성(樂聖)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음악가에게 있어서 청각은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데 베토벤의 치명적인 귓병은 그가 젊었을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1796년에 귀의 나팔관 카타르를 진찰하였는데 이것이 1799년경에 급성 중이염으로 악화되었다. 치료가 제대로 되지 못하여 중이염은 만신창이가 되고 이에 따르는 모든 결과는 참혹한 것이었다.
밤낮으로 귀는 윙윙거렸고 해가 지날수록 귀는 더욱더 어두워갔다.
젊은 베토벤은 음악 창작에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자신에게 닥쳐 온 귓병이라는 불운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나는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네. 2년째 나는 일체 사교를 피하고 있네. 사람들과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이네. 나는 귀머거리가 된 것이네. 내가 다른 직업을 가졌다면 그나마 어떻게 될 수도 있었겠지만 나의 직업으로는 이것은 무서운 처지네. 나의 적들이 무어라고 하겠는가, 그것도 적지 않은 수의 적들이! …… 나는 얼마나 여러 번 나의존재를 저주하였는지 모르네! …. 될 수만 있는 것이라면 나는 운명과 싸워보고 싶네. 그러나 나는 신이 창조한 가장 비참한 인간이라고 느껴지는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네… 체념! 얼마나 슬픈 피난처인가! 좀 더 큰 목소리로 말해 주시오. 고함을 질러 주시오’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 아!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보다 나에게 있어서는 더 완벽해야할 그 감각이 ….(중략) 너희들의 동아리에 섞이고 싶으면서도 외따로 떨어져 살고 있는 나를 용서해 다오. 그 때문에 나는 오해를 받아야 하는 까닭에 이 불행은 이중으로 나에게 괴로운 것이다. (중략) 나는 고독하다. 참으로 나는 고독하다. 부득이한 경우라야만 나는 세상 사람들 사이로 나간다. 마치 쫓겨난 사람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 가까이 가면, 내 병세를 남들이 알아차리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무서운 불안에 사로잡혀 버린다. (중략) 그러나 여러 번 나는 사람들과 사귀기 즐겨하는 내 성미에 못이겨 사람들의 모임에 발을 들여놓은 일이 있었다. 하지만 나의 곁의 사람이 멀리서 들려오는 피리소리를 듣고 있는데 나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든가, 또 그 사람은 양치는 목자의 노래 소리를 듣고 있는데 나에게는 여전히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적에, 나의 굴욕은 어떠하였으랴! 그러한 경험들로 말미암아 나는 거의 절망하기에 이르렀다. 하마터면 나는 스스로 내 목숨을 끊을 뻔하였다. 아아, 인생은 아름답기도 하다. 그러나 나의 인생에서는 영원히 쓰디쓴 독기가 빠질 길 없다.’(로망 롤랑의 베토벤의 생애)
결국 그는 30대 중반에 자살하기로 결심하고 동생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기도 했었는데, 그것이 바로 잘 알려진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다. 그러나 그것을 제지하여 준 것은 오직 예술뿐이었다.
그는 음악가에게는 곧 죽음이나 다름없는 귀머거리라는 삶의 고통을 받아들이기로 각오했다. 그에게 걸머지워졌다고 느껴지는 이 사명을 완수하기 전에는 이 세상을 버리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는 이 비참한 생명을 부지하기로 하였다.
그러한 각오로 새로 작곡했던 교향곡이 유명한 그의 6번 교향곡 \'전원(Pastorale)\'이다. 베토벤은 그 곡의 악상을 얻을 그 당시, 요양지였던 전원의 시냇가와 숲속을 산책하면서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교감했노라고 후에 스스로 토로한 바 있다. 한편, 종교음악이 아니면서도 신적인 \'자연계시\'를 그처럼 완벽하게 나타내주는 음악, 또한 인간의 심신을 그처럼 평온하게 감싸주는 예술 작품은, 그의 이 전원 교향곡 말고는 세상에 달리 더는 없다고 말하고 싶다.
베토벤은 그에게서 사라져버린 하나의 세계를 그의 정신 속에 재창조하였다. 새들의 노래를 듣기 위하여 베토벤에게 남아 있던 유일한 방법은 자기 자신 영혼 속에서 새들을 노래시키는 것이었다.
자신의 고뇌 한가운데 내면의 영혼으로 들었던 음의 세계를 오선지에 옮겨 불후의 작품으로 형상화(形象化)시킨다는 것, 그것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그만의 독특한 음악세계다. 새들의 노래 소리의 그 표현이 그처럼 아름답고 감동적인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베토벤은 완전히 귀머거리가 된 50대 들어 불후불멸(不朽不滅)의 작품, 9번 교향곡 \'합창\'을 완성시켰다. 연말연시면 연주되는 합창 교향곡은 그래서 감동을 더해준다. 초연은 베토벤 자신의 지휘로 장장 한 시간 반 가량의 연주시간 내내 연주회장을 들뜸과 열기로 가득 메워 놓았다. 4악장 피날레의 연주가 끝났을 때, 객석에서는 우뢰와 같은 기립박수가 계속됐다. 귀부인들은 벅찬 감동으로 흐느꼈다. 그러나 귀머거리였던 베토벤은 그러한 분위기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오케스트라 석을 향해서 고개를 떨군 채로 서 있었다. 결국 알토 가수가 베토벤의 소매를 끌어 객석을 바라보게 했을 그 때서야 베토벤은 자기를 향해 환호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는 이렇게 편지에 썼다. \'나의 예술적 천분을 충분히 발전시킬 기회를 가져보기 전에 죽음이 닥쳐온다면 나의 운명이 너무나 가혹해서 죽음이 그렇게 일찍이 오는 것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이고, 다만 좀 더 늦게 와 주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허나 그래도 나는 만족하리라.
죽음은 나를 끝없는 고뇌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고 싶을 때에 언제든지 오라. 나는 너(죽음)를 용감히 맞으리라.\'
모차르트처럼 천재성이 강하지가 못했던 베토벤이, 결국은 오늘날 모차르트의 음악적 업적을 훨씬 능가했다고 평할 수 있게 됐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베토벤의 인간성과 불굴의 노력의 결과라고 믿고 있는데, 어떻든 베토벤의 악곡들에는 다른 누구의 작품보다 더욱 짙은 인간애가 깊게 배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의 음악들은 윤리적인 태도와 함께 인류를 향해서 강하게 호소하는 무한한 힘이 내재되어 있다.
대체적으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베토벤은, 자신의 음악적 진실 외에 세상의 다른 어떤 것들과 절대로 타협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음악들이 세상의 어떤 권력자의 힘보다도 인류를 향해 더욱 가치가 있는 것이며, 또한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다. 베토벤은 나폴레옹이 제위에 올랐다는 것을 알고 분개했다.
‘그래 그도 범인(凡人)에 지나지 않더란 말인가!....’
분격한 나머지 그의 헌사를 찢어버렸다.
베토벤이 위대한 악성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다독이고 끝없이 노력한 결과다. 그는 항상 돈 걱정에 쪼들리고 살았다. 열일곱 살 때에는 일가의 가장이 되어 두 어린 동생의 교육을 책임져야 했다.
집안을 다스려 나갈 능력이 없는 술주정뱅이 아버지를 은퇴시켜 줄 것을 자기 스스로 청원해야만 한다는 것은 그에게는 부끄러운 일이었다.
1818년에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거의 비럭질을 해야 하게끔 되었으니 일부러 군색하지 않은 척해야만 한다’
빵을 벌기 위해 작품을 써야한다는 건 기막힌 노릇이다.
작품 제106번의 소나타는 궁색한 사정에서 쓰여진 것이다.
그는 번번이 구두가 헤어져서 외출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출판사에는 막대한 빚이 있었기 때문에 작품을 내어도 수입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그는 언제나 자기의 처소를 흡족히 여기지 않았다.
35년 동안 그는 비인에서 서른 번이나 이사를 했다.
작곡을 하는 사람이 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그것은 입 없이 밥을 먹으라는 것과 같은 말이다. 어떻게 음의 미성과 악성을 파악하며, 음의 조화와 균형을 맞출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는 끊임없이 마음의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마치 우리 마음과 영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분별하며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의로우신 뜻을 이루듯이 말이다.
만일 그가 청각장애를 슬퍼만하고 인생을 포기했다면 그의 음악은 영원히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자기 최선의 것을 세상에 주기 위해서 비단 자기의 행복을 희생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전부를 바쳐 깊이 상처를 입고 자기의 몰락에 까지 가까이 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슬픈 사람, 인내와 우울을 간직한 사람, 즉 자기가 사랑했던 진리를 위해 병들고 우울한 인내자 였다.
제 9번 교향곡 합창은 너무도 열광적인 감동 감격을 일으켜서 경찰이 소요를 진압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승리도 일시적이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주어지는 경제적 효과는 전혀 없었다. 음악회에서 들어온 수입은 한 푼도 없었던 것이다. 물질적인 곤궁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그는 가난했고 병에 시달렸고 외로웠다.
그때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아폴로와 뮤즈들은 아직도 나를 죽음의 신에게 내맡기려고 하지는 않겠지요. 나에게는 아직 이 예술의 신들에게 해드려야 할 일이 많이 남았으니까요. 저승으로 떠나기 전에 나는 하나님이 나에게 영감을 내리어 완성하라고 명하는 것을 성취해 놓아야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음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별로 쓰지도 못한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모든 불행 뒤에는 반드시 좋은 일이 따르는 법인데, 그 좋은 일이란 죽음의 해방이었다. 베토벤은 죽음의 자리에서 빈데에 물려 고생 하고 있었다.
그의 눈을 감겨준 것은 아무 인연도 없는 알지 못하는 사람의 손이었다(1827년 3월 26일).
‘나의 예술은 가난한 사람들의 행복에 이바지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그는 썼다. 그는 오늘 날, 괴로움을 겪으며 싸우는 사람들의 최대 최선의 벗이 되었다. 그가 모진 고난 속에서도 생명을 견딜 수 있게 했던 것은 도덕감(道德感)이었다.
1810년 5월 2일, 그의 친구 베겔러에게 보낸 편지에는 ‘내가 어디선가 사람은 아직도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동안엔 스스로 원해서 인생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읽은 일이 없었던들 나는 벌써 오래 전부터 이 세상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어린이들에게 도덕을 권한다. 그것만이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돈이 아니다. 경험에 비추어 나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비참한 지경에 빠졌을 적에 나를 받들어 준 것은 도덕이었다.
내가 자살로 인생을 끝마쳐 버릴 수 없는 것은 내 예술의 덕택이기도 하지만 또 도덕의 덕택이기도 하다. 괴로움을 돌파하여 기쁨으로!’ 라고 그는 외쳤다.
때마침 산마루 서신의 이주연 목사님께서 ‘살아서 살아야 한다’는 글을 보내 오셨다. 이는 마치 베토벤의 생애를 조명하는 듯하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확실한 것은 무엇인가?
첫째는 우리가 이 세상에 왔다는 것이고, 둘째는 떠난다는 것이다.
셋째는 아직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선택할 길은 무엇인가?
오직 한 가지!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살되 살아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영혼이 살아서 사는 삶, 그것이 아니면 안 된다.
그렇다면 살아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는 흐르는 시간의 강물에 죽은 채로 떠내려가는 삶을 살지 말라는 것이다. 오직 깨어난 영혼으로 살라는 것이다.
둘째는 욕망과 본능의 인력 장에 갇힌 채 살지 말고 이를 초월하여 진정한
자기로서 자기 길을 가야 한다.
셋째는 남의 인생을 살지 말라는 것이다.
세상이 규정해 준 것이 아니라 오직 창조주께서 세상에 내신 뜻을 깨닫고
그 길로 우물쭈물하지 말고 결연히 그러나 여유롭게 자기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이다.
* 바위처럼 인내하십시오.
그만큼 깊어지고 견고해지고
관대해질 것입니다(약1:4, 약5:11).
* 하나님께 힘을 얻고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열린 자는 복이 있다.
그는 눈물의 골짜기도
샘이 흐르는 축복의 골짜기로
바꾸어 놓는다(시84:5-6).
* 어떤 행동을 바꾸려고 시도하기 전에
마음부터 먼저 바꾸어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면 안 될 일도 되게 하고
어려운 일도 쉽게 만든다(빌4:13 신10:16 출31:6).
* 열정은 모든 창조의 에너지다.
열심을 가지지 않고 이룩된 큰일은 세상에 하나도 없다.
세상 창조물을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은 대단하며
한 치의 오차도 없다(시121:3 시146:6).
* 하나님의 열심은 그의 뜻을 반드시 이루신다.
열심을 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은혜도 받는다.
(벧전4:7-8 왕하19:31 사9:7)
* 낙심과 절망은 사탄이 주는 것이다.
긍휼을 얻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
예수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자.
그가 네게 힘을 주시리라(히4:16 시42:5 시43:5).
◆ 저는 신앙의 여정 가운데 특별한 의미의 삶과 죽음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어느 교회이든 제게 간증 설교할 기회를
주시면 기꺼이 제 자신을 헌신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말숨\' 산문집 1권을 구매해 주시면 1권이 사랑의 선물로
전국 교도소, 군, 경찰, 학원, 병원에 님의 이름으로 기증됩니다.
(각권 13,000-15,000원. 전6권. 농협:301037-51-098385.
호산나교회 010-9059-4037)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