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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과학계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
컴퓨터가 처음 나왔을 때는
집 채 만 한 크기였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손바닥만
한 크기에 모든 기능을 압축하여 쓸어 넣고도
더 좋은 성능을 나타내게
되었다. 하다못해 쓰레기 청소차에도
버튼 하나만 누르면 자유자재로 물건을 싣고 내리는 크레인 기능을 할 수 있게 되었다.
1948년 마이크로모듈은
전기회로(電氣回路)가 편성되어 있는 기판을 개발했다.
이것은 8×8 mm2
정도의 사각형 세라믹 절연기판 자기(磁器) 위에 트랜지스터 ·다이오드 ·저항 ·콘덴서
등을 정밀하게 만들어 부착시킨 것을 여러 장
겹쳐서 전자회로를 구성시킨 것이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반도체 고밀도 집적회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제품의 소형화에 성공했다. 한마디로 신기한
세상이다.
나는 이런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영적인 세계의 오묘함을 새삼 느끼고 있다.
영적인 세계는 우리 인식
밖의 일들이니 모두 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있겠지만 모르는 것 투성이인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삶과
역사를 다루시는 방법을 보면 한마디로 신비한 것들이다.
그 어떤 분명한 영적인
원리가 흐르고 있는데, 그것이 표현되는 역사의 현장은 참으로 다양하기 이를 데 없고, 정형화(定型化)하고 객관화(客觀化)시켜서 말하기 어려운
내밀(內密)한 차원의 관계성이 있는 것이다.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과 다스림을 받는
인간 사이에는 분명한 위계질서(位階秩序)가 있다. 주권자의 그 어떤 뜻은 명령과 함께
실행되게 되어있다.
상위(上位)의 뜻은 하위(下位)가
이해하던 못하던 그것과는 상관없이 이루고야 마는 것이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시107:10) 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은 영적인
법칙과도 같은 하나의 원리다.
이 말씀이 역사의 삶 속에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는 문제는 한마디로 말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매우 복잡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컴퓨터의
소프트웨어와 같다.
컴퓨터는 본체인 하드
디스크와 응용 프로그램인 소프트웨어로 되어있다.
하드 디스크는 컴퓨터가
실행되게 하는 기계 장치로서 하나의 원리와도 같다면,
소프트웨어는 끝도 없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다양한 응용 프로그램이다.
성경은 마치 하드웨어가
만들어 내는 수많은 소프트웨어 같다.
‘솔로몬은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 부친 다윗이 여호와를 온전히 좇음같이 좇지 아니하고 모압의 가증한 그모스를 위하여 예루살렘 앞산에 산당을 지었고 또
암몬 자손의 가증한 몰록을 위하여 그와 같이 하였으며 저가 또 이족 후비들을 위하여 다 그와 같이 한지라. 저희가 자기의 신들에게 분향하며
제사하였더라 .
솔로몬이 마음을 돌이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저에게 진노하시니라. 여호와께서 일찍이 두 번이나 저에게 나타나시고, 이 일에 대하여 명하사 다른
신을 좇지 말라 하셨으나 저가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말씀하시되 네게 이러한 일이 있었고 또 네가 나의 언약과
내가 네게 명한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결단코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복에게 주리라(왕상11:6-11).
모압과 암몬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이방혈통의 대명사로서, 불 신앙자 ‘에서’(약속의 씨인 야곱의 형)를 조상으로 하는 에돔 족속이라는 가계(家系)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창36:40-43).
예로부터 이스라엘은
이들과의 통혼(通婚)을 금지시켰다.
이들이 이방신들을 끌고 들어와서 네
아들과 딸들을 유혹하여 하나님을 버리게 하기 때문이다. 솔로몬이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자 어느새 마음이 교만해져서 사치와 방탕과 쾌락을 좇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두 번씩이나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책망했지만 솔로몬은 그 말씀을 경멸하고 듣지 않았다.
솔로몬은 전무후무한 지혜를 하나님께 은혜로 받았지만, 그가 죄악에 마음이 어두워지자 우매한 자가 되고 말았다.
어두움의 권세자 마귀에게
붙잡히면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여, 그 가는 길을 모르게
되어있다(요일2:11).
잠언서를 보면 솔로몬은
지혜가 얼마나 출중했는지 시, 문학, 역사, 천문 뿐만 아니라 동 식물의 세계까지 꿰뚫어 아는 박물학자이기도 했다.
그러한 그가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나니까 어리석은 자가 되고 만다는 것!
이 또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은 사랑의 채찍을
들기로 작정했다.
그것은 역사의
심판(審判)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하나님은 아비 다윗과
맺은 계약을 생각해서 솔로몬의 아들 대에 가서 나라를 찢어 분열되게 하실 것이고(12절), 이 일들이 실행되기 위한 역사적인 조건들을 솔로몬
생전에 만들어 가셨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역사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는가?
성경은 자세히 말씀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에돔 사람 하닷을 일으켜 하닷으로 하여금 솔로몬의 대적이 되게 하셨다(14절). 일전에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이 에돔의 남자를
다 쳐서 죽인 일이 있었는데, 그 때에 하닷은 작은 아이였었다. 그런데 하닷의 아비의 신복이 하닷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신하여 하닷이 애굽 왕
바로 밑에서 자라게 되었다. 하닷은 바로에게 크게
은총을 입고 바로 왕의 처제 곧 왕비 ‘다브네스’의 아우를 아내로 삼게된다. 애굽에서 막강한 힘을 얻은 하닷은 다윗과 다윗의 심복이었던 요압
장군이 죽었다는 사실을 듣고는 고국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한다.
바로왕은 묻는다. `네가
나와 함께 있어 무슨 부족함이 있기에 네 고국으로 가기를 구하느뇨'. 대답하되 `없나이다 그러나 아무쪼록 나를 보내옵소서'
하였더라(22절).
하닷은 아비의 원수를 갚고자 했고
솔로몬과 전쟁을 하려는 결심을 실행에 옮기게 된다. 이렇게 하여 역사의 흐름은 솔로몬에게 대단한 곤고(困苦)와 환란(患亂)의 모습으로 체험되게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수리아 왕 르손이 일어나 솔로몬의 대적이 되었다. ‘ 솔로몬의 일평생에 하닷의 끼친
환난 외에 르손이 수리아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미워하였더라’(25절).
그래도 솔로몬이 깨닫지 못하자 이번에는
또다시 솔로몬의 신복 이었던 큰 용사 여로보암이 일어나 솔로몬을 대적했다.
후일에 솔로몬이 죽고 아들 대에 가서
여로보암은 이스라엘 12지파 중에서 10지파를 등에 업고 북왕국 이스라엘을 만들어 이스라엘이 남,북 왕조로 분열되게 하는 장본인이 되었다.
솔로몬이 여로보암을 죽이려 하자 애굽으로 도망가서 애굽왕 시삭에게 붙어 있으면서 기회를 엿보다가
솔로몬이 죽자 귀국하여 나라를 찢어 버린 것이다(40절).
이 과정을 비교적
소상하게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데, 이런 역사의 흐름이 되게 한 그 배후 동인(動因)은 하나님의 손길이라는 것이다.
‘원래 여로보암은 매우
부지런하고 일도 잘 했던 용사로서, 솔로몬의 눈에 들어 공사 감독으로 발탁되었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솔로몬이 범죄하자 하나님은 아히야 선지자를
여로보암에게 붙여주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받게 하고 솔로몬의 대적자가 되게 하였다. 결국 남왕국 유다는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북왕국 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이 왕이 되어, 그 이후 남과 북은 멸망할 때 까지 서로 원수지간이 되어 골육상쟁 (骨肉相爭)의 피를 흘리는 역사를
연출하게 된다(왕상11:26-40).
인간은 이러한 역사의
자취를 주의 깊이 살피고, 하나님의 행하시는 손길을 깨달으라는 것이고, 하나님은 심판을 통해서 그것이 얼마나 준엄한 것인가를 뼈저리게
각인(刻印) 시킴으로서, 인생을 교훈하셨던 것이다.
한마디로 삶에
우연(偶然)은 없다는 것이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이
허락지 않으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마10:29).
사람 눈에는 우연처럼
보이고, 때로는 사람 판단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이 존재하지만, 모든 것이 하나님의 품안에서 되어지는 것이요,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신다면
설명되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특정한 인물을
복 주시고 형통케 하시는 일도 마찬가지다.
요셉이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서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을 맡아 일하는 하인이 되었을 때다. 하나님이 요셉을 존귀한 인물로 만드시려고
섭리하시기 시작 하셨다. 우선 요셉이 몸 담고 있는 보디발의 집을 복 주시기 시작하셨다.
요셉을 위하여 요셉
때문에 보디발의 집이 복을 받는다는 말이다.
‘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으로 가정 총무를 삼고 자기 소유를 다 그 손에 위임하니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창39:2-5).
보디발의 밭에 수확이
전년도에 비해 눈에 띄게 증가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요셉 때문에 보디발이 복을
받는 이런 현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내가 ‘한 입 가득 베어
문 레마’라는 책을 출간한 후 처음으로 전라도 익산을 방문하여 김 00 목사님을 찾아뵙고 감사인사를 드렸다. 나와는 알지도 못했던 그 목사님은
책 출판을 위하여 두번째로 사랑의 후원금을 보내주셨다. 내 글을 감명깊게 읽으신 목사님은 내가 쓴 글 속에서 자기 자신과 동질성을 발견했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 분의 사역
현장을 보고 많은 감동을 받았다.
사회에서 버림받은 미혼모와 그 자녀들을
하나님의 대리인(代理人)으로 대접하는 절대긍정의 인간애와 그 순수성, 그리고 하나님이 친히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을 구체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김 목사님 부부께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드렸더니
하나님은 놀라운 손길로 목사님 가정에 복을 주시고 갚아 주셨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목사님
아들에게 특별한 하늘의 지혜를 주셔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3년 월반(越班) 하여 공주에 있는 특목고, 한일고등학교를 진학하게 하시고, 우수한
성적으로 올해 졸업하여 카이스트, 서울대학, 연세대학, 고려대학 가운데서 그 어느 곳이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선택하여 진학할 수 있는 특전을
부여받는 영광을 얻도록 하신 것이다.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의 기이한 은혜의 손길이라는 것이다.
요셉을 복 주신 하나님은 보디발의 집에
복을 주셨고, 김 철례 권사님을 대접하신 하나님은 그 아들 원 종수에게 복을 주셨고,
김 목사님을 복 주신 하나님은 그 아들에게 복을
주셨다..... 이런 현상은 자연과학적인
설명으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차원인 것이다. 인생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은 기이하기만 하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하라’고 했다(시107:15). 이처럼 영적인 하나님의 손길은 삶속에
알게 모르게 개입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모든 일들을 주의 깊고 사려
깊게 볼 수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분별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불신앙의 눈으로
보면 절대로 알 수 없게 되어있다. 표피적으로 나타난 현상들만 가지고 이해하려 하면, 그 한계가
여실하다. 그러한 일들이 생겨나게
된 근본 원인, 이를테면 ‘하나님의 손길’이라는 영적 동인(動因)에 대해서는 까막눈이 되기 때문이다.
다음의 말씀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할 과제들을 던져준다.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마13:14).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그러므로 수고로 저희 마음을 낮추셨으니 저희가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 얽은 줄을
끊으셨도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
(시107:8-15).
하나님이 인생에게 행하신
일들은 참으로 기이(奇異)한 일들이 많다.
여호와의 인자하심 또한 하나님을
사모하는 가난한 심령들에게 만족케 하시고 풍성함으로 넘치도록 채워주신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 찬송과 존귀와
영광을 돌려 드리기에 합당한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잘못된 길로 갈 때는 수고로 저희 마음을 낮추기도 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목말라 찾고
회개하며 돌이킬 때는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사 얽은 줄을 끊으시기도 하신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우리
삶 속에서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고 체험하고 찾아 나서고 추구하는 최고 수준의 높은 경지인 것이다.
*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끔찍한 범죄 현장에는
항상 두 주인을 섬기는
음란한 우상숭배가 있고
이는 반드시 파멸을 보여
주었다.
전심으로 여호와만
섬기자(마6:24, 대하21:11).
* 하나님이 말씀을 보내사
서리를 재같이 흩으시고
추위를 녹이사
물이 흐르게 하시니
봄봄봄
봄이다!(시147:15,시62:11).
* 무지한 말이나 노새같이
되지 말자.
내 죄악을 숨기지 말고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고 회개하자(시32:5-9).
* 하나님은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시며
그 행사는 다 진실하시다.
악은 거룩하신 하나님
이름을 걸고
반드시 멸하시고
심판하신다(시33:5).
* 하나님이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말씀이시다(시33:9).
* 세상에는 빛과 어두움,
선과 악
진실과 거짓, 긍정과 부정
하나님과 마귀, 생명과
죽음이 혼재해 있다.
분별력을 잃어버리면
정말 많은 것을
잃는다(왕상3:11,엡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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