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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은 만물의 아버지시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품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들, 이 모든 존재가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비롯된 것들이다.
히브리서에는 하나님을 ‘모든 영들의 아버지’라고 했고(히12:9), 창세기 1장 1절에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했다. 아버지라는 뜻은 말 그대로 나를 낳으신 조상(祖上)이라는 뜻이다. 아버지 없는 나를 생각할 수 없고 상상할 수도 없다. 아버지와 나는 불가분(不可分)의 관계다.
헬라적 사유(思惟)의 전통에서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숱한 논쟁을 하고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수많은 이론들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히브리 신앙에서는 신의 존재 증명 같은 헛된 노력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에서부터 시작한다.
애초에 질문이 잘못된 물음은 답변할 수도 없고, 답변할 필요도 없다. 마찬가지로 스스로 자명(自明)하신 절대지존(絶對至尊)이신 하나님은 존재증명 여부의 대상이 되기를 거부하신다.
만일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존재 증명 어쩌고 하면서 나선다면 그는 자기 주제조차도 파악하지 못하는 불경(不敬)스러운 자일 것이다.
인간은 감히 하나님을 볼 수 없다고 말씀한다.
사람이 하나님 얼굴을 보고 살자가 없다고 했다.
허물진 인간이 영광의 하나님을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세상의 권세 자, 임금 앞에서도 신하는 정면으로 보지 못하고 얼굴을 조아리며 자신을 낮추지 않으면 안 되거늘 하물며 만왕의 왕 하나님 얼굴을 어찌 정면으로 뵐 수 있겠는가!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서 40 주야를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만나 주시고, 두 돌 판에 십계명을 친히 쓰셔서 증거 판 둘을 주셨다. 그러나 백성들은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세의 지도력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하나님께 대한 불신과 원망의 마음은 점점 커졌다. 어리석은 백성들은 제사장 아론을 부추겼다.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고 했다.
미혹(迷惑)된 아론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을 숭배하기에 이르렀다. 하나님의 명을 속히 떠나, 마음이 부패하고 목이 곧은 행동을 했다. 하나님은 쓸모없는 타락한 백성들을 진노의 심판으로 모두 멸하려 했다. 이들을 통해서 가나안 땅에 하나님 나라의 모델을 만들려고 했으나, 대단히 실망했던 것이다. 더 이상 하나님께 쓸모가 없어지면 버림을 당할 수 있다. 그 때 모세는 하나님께 눈물로 간청했다.
'여호와여 ! 어찌하여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 하게 하려 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주를 가리켜 그들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나의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출32:11-13).
모세는 필사적으로 하나님의 긍휼하신 자비를 구했다.
하나님은 언제나 눈물의 기도에 약하시다. 외면을 못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특별하게 생각하셨다. 모세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은 하나님의 종이었다. 지면에서 모세만큼 온유한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실 정도다. 하나님은 모세를 이름으로도 안다고 했고, 하나님 목전에 은총을 입은 자라고 했다. 하나님께 은혜 입은 사람 모세는 하나님께 은총을 구했다. 모세가 가는 길을 편케 할뿐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함께 가리라고 말씀했다. 그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표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애원했다. 모세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셨다.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셨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고 말씀했다(약5:16-18).
인간의 간구가 하늘 보좌를 움직이고, 하늘이 정한 뜻을 돌이킨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하늘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는 영적인 비밀이요, 복 중의 복이다.
모세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선한 형상을 모세 앞으로 지나게 하면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반포하셨다.
모세는 자기 앞을 지나가시는 하나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보았지만 하나님의 얼굴만은 보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살 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 대신 하나님의 영광이 지나 갈 때에 모세는 하나님의 등을 보았다고 말씀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 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 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섰으라.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출33:19-23).
세상에서 가장 큰 일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친히 만나 뵙고 구원받는 일이다.
세상에서 가장 큰 복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하나님의 아신 바 되고,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계시의 그릇이 되는 일이다.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일이 무엇인가 ?
하나님께 귀히 쓰임 받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하나님의 종이 되는 일이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의 면전에 서기를 소원해야 한다.
하나님 면전(面前)에 서는 순간 사람은 죽음을 경험한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거룩하심과 의로우심이 너무나 커서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녕 하나님 면전에 선다면, 그는 미물(微物)보다 못한 자신을 발견하고 모든 할 말을 잃어버릴 것이다.
다만 나직한 속삭임만이 끊임없이 되풀이될 것이다.
‘주여! 나를 버리지만 않으신다면, 내가 하나님께 버림받지만 않는다면, 내가 천국에서 상급은 고사하고 천국 문 앞에서 쫓겨나지만 않더라도 황공무지로소이다! 하고 고백하게 될 것이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다만 그뿐입니다.....’
케노시스 영성원장이신 강인태 목사님은 생생한 ‘주님 면전’을 체험한 하나님의 종이다. 오늘의 종교개혁을 위해서 하나님이 특별히 뽑아 세우신 하나님의 사람이다.(그의 저서 ‘하비루의 길, 죄인의 길, 비움의 길’은 특별한 주님의 면전을 체험한 후에 하나님의 귀하신 섭리로 세상에 나온 귀한 책이다. 특별히 정독으로 일독을 권한다)
「1993년 5월 10일(월요일):
새벽기도 시간에 회개의 영이 임하여 간절한 회개기도를 하고 있었다. 어떤 행위의 죄가 아니라 나 자체가 죄의 화신으로 느껴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회개가 깊어지자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고통당하시는 모습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거친 숨소리와 신음은 물론이고 십자가에서 흘리시는 피가 땅으로 툭, 툭 떨어지는 소리까지도 그대로 나에게 전달되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고통당하시던 그 현장에 내가 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이렇게 기도했다.
“저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주님께서 흘리시는 피가 지금 저에게 떨어져 나의 죄를 깨끗하게 하옵소서”
그러자 정말로 주님의 피가 내 머리의 정수리에 한 방울 뚝 떨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무슨 일이 내게 일어났다.
마치 누군가가 앉아있던 나를 뒤에서 집어던진 것처럼 얼굴을 바닥에 대고 앞으로 엎드려졌다. 동시에 어떤 강한 힘에 압도되어 도무지 숨을 쉴 수가 없었고, 강한 전율과 짓눌러 오는 압박감으로 도무지 나를 지탱할 수가 없었다. 죽은 게 이런 상태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분명 죽은 것은 아니었다. 밖에서 오가는 자동차소리, 길을 오가는 사람들의 낯익은 말소리들이 들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 그 순간 내게 스쳐가는 어떤 강한 느낌이 있었다. “아하, 내가 지금 주님 발 앞에 엎드려져 있는 것이구나!” 분명 그랬다. 나는 주님 앞에 엎드러져 있었고 주님은 내 앞에 서 계셨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를 위해 고난당하신 주님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태산이 짓눌러오는 것 같은 압박감과 전율 때문에 도무지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주님의 얼굴은 감히 생각도 못할 일이고, 주님의 발잔등에 있는 못 박히신 흔적만이라도 보고 싶어서 얼굴을 조금만 들어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압도해 오는 어떤 강한 힘 때문에 얼굴을 드는 것은 고사하고 내 몸 전체가 오히려 땅으로 꺼져 들어가는 것 같았다. 더 이상 나를 지탱할 수가 없어서 곧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까치우는 소리가 크게 들리는 바람에 정신이 들었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를 몰라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직도 내 몸에는 어떤 전율과 힘이 와 닿고 있었다.
그 순간 “아차, 오늘이 지방 목회자들 수양회 가는 날이구나” 라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전혀 갈 마음이 없었으나, 내가 그날 쓸 돈을 가지고 있는 관계로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시계를 보니 약속 된 시간이 임박해 있었다. 급히 일어나 나오면서 까치소리 때문에 정신이 들었음을 기억하고는 “까치가 어디 앉아서 울었는가?” 하고 문 앞에 있는 큰 참죽나무를 올려다보려는 순간 깜짝 놀랐다.
내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고 작게 느껴지는지 “나는 저 까치만도 못하다”라는 느낌 때문에 감히 눈을 들어 하늘과 까치를 바라볼 수 없었다. 도저히 얼굴을 쳐들 수가 없어서 포기했다.
얼굴을 내리자 5월을 맞아 한참 자라 오르는 이름 모를 풀들과 사철나무에서 돋아나는 새순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나는 저런 들풀들만도 못하구나!”라는 생각 때문에 이것들도 부끄러워 도저히 쳐다볼 수가 없었다. 신을 신으려고 땅을 내려다보는 순간 나 자신이 내 발 아래 밟히는 땅과 먼지들만도 못하게 느껴져서 이것조차 쳐다볼 수도 밟을 수도 없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어서 억지로 신을 신고 발을 떼자 “흙먼지만도 못한 내가 이것들을 밟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약속된 장소로 가면서도, 하루 동안 단양을 중심으로 돌아다니면서도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사람들과 시선이 마주치는 동안만 겨우 진정이 되었다. 하루 종일 나는 남의 시선을 피한 채 눈물만 흘리고 다녔다.
눈물, 또 눈물, 내 눈에 이렇게 많은 눈물이 있었던가!
1993년 5월 12일 (수요일):
지난 10일의 경험 이후에는 입이 닫혀버렸다. 하루 종일 꼭 필요한 말 이외에는 침묵이었고, 기도시간에도 오직 “오, 주님!”이라는 탄식의 한마디 외에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말 한마디에 온통 눈물이 쏟아져 나왔고 깊이 감동되었다. 입이 닫힌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부정한 내 입술로 주님께 어떤 기도를 한다는 것이 가당치 않게 느껴져서 마음속으로 나 자신의 입술에 대한 회개를 많이 했다.
너무나 큰 것을 보면 입이 닫힌다고 하던가. 내가 그랬다. 한동안 나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오직 눈물만 쏟을 뿐이었다. 주님을 생각만 해도 눈물은 도랑물처럼 흘러내렸다.
5월 10일의 일은 최초로 하나님 면전에 서는 경험이었다.
이 경험이 내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의 그 전율, 무어라고 표현할 길이 없고, 이 세상에서는 그런 떨림이 없다. 떨림과 숨 막힘과 압박감, 세상 언어에는 이 상태를 표현할 말이 없는 것 같다. 지금도 나는 감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못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왜 하나님의 함자를 부르지 못하고 ‘아도나이’(주님!) 라고 불렀는지를 이때에 비로소 이해했다. 그분은 이름으로 부를 수 없는 분이시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하나님 앞에 한번 서 보라. 단 5초를 견뎌낼 수 있는 자가 없으리라”
*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며
지금도 준비된 사람을 찾으신다.
하나님의 고민은 준비된 사람을 찾을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창12:1-3 잠24:12 행13:22 딛1:15).
* 하나님은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니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겨야 한다.
우리가 전심으로 저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버리면 저가 우리를 영원히 버리신다(대상28:9).
* 우리 삶과 역사는 하나님의 언어다.
역사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시대는
반드시 망하게 되어있다(신4:33-36 시95:7 히3:7).
* 영성화의 과정은 세 존재
즉 하나님과 나와 악마의 존재를
깊이 경험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하나님을 체험한 만큼 나를 보게 되고
동시에 그만큼 악마를 경험하게 된다(출9:14 요8:32).
* 악마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유일한 지름길은
자기를 낮추는 것이다.
악마와의 싸움에서 얻는 결실은
무슨 영적인 능력이 아니라
자기를 낮추는 겸손이다(마20:26-28 눅18:11-13).
* 영적인 신비체험들은
내적인 죄 성을 정화시키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사6:5).
* 영적인 신비체험 중에
영적인 능력을 얻으려고 시도하면
반드시 악마의 그물에 걸려들고 만다.
이단들, 사이비 교주들은 그 좋은 예다(살후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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