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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재준 집사님께.
잘 주무셨습니까.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는 글 올립니다.
인생은 고난이라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과제를
태어날 때부터 숙명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집사님 같은 경우를 저는 많이 보았고,
제가 아주 가까이 하고 있는 분도 그런 분이 계십니다.
아무튼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과 단독으로 해결해야만 합니다.
앞으로 자주자주 글 올리겠습니다.
주일 날 뵙기를 기대하오며 이만 줄입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염동권 목사 올림.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스라엘은 고난의 길을 걸어가면서
하나님을 삶으로 체험하고 가장 위대한 신앙의 깨달음을 얻은 백성으로 유명하다.
우리나라와 이스라엘은 남달리
고난의 역사를 체험했다는 점에서 그 어떤 동질성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그런지 유일신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부흥의
전통을 갖고 있다.
우리가 겪는 고난 속에 그 무슨
비밀스런 신비한 약효라도 있는 것일까?
1. 대체로 사람이 겪는 고난은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성격이 크다.
죄는 심판을 피할 수 없고 심판은
고통을 가져오는 주된 원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지존(至尊)하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면 당연히 벌을 받고 저주스런 고통을 경험한다. 재난, 전쟁, 사건 사고, 기아, 질병 등의 변형된 형태로
고통이 찾아온다(시107:11-12, 시107:39-43).
얼마 전 나와 가깝게 지내는
친구가 의미심장한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젊어서 인본주의적인 성향을
가졌을 때는 성선설(性善說)을 두둔했는데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는 자연스럽게 성악설(性惡說)을 지지하게 되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참 알 수 없는
묘한 존재다. 어려움을 당하고 고통스러운 징계를
당하지 않고는 좀처럼 사람이 사람답게 될 줄 모르는 간사한 존재다.....”
하나님께 특별히 선택받은
선민(選民) 이스라엘이 그랬다.
그들이 잘나서 선민이 아니다.
이스라엘은 본래 행악의 종자, 패역한 족속이요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다(신9:6,
사1:2-6).
그들은 먹고 배부르고 등 따스우면
금새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세상길로 나갔다. 하나님을 배신하고 하나님 목전에서 악행을 하고 풍요의 신 바알이나 아스다롯을 섬기는 우상숭배에
빠졌다.
이처럼 참 생명과 진리 되신
하나님 대신 헛되고 악한 세상 신들과 우상숭배에 빠지면 즉시 정신이 썩고 타락하게 되어있다.
세상의 복잡한 문제들은 모두
여기에 뿌리를 두고 곁가지를 친 것들이다.
진실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그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여호와 하나님은 사랑하기 때문에
질투하고 진노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블레셋이나
애굽 같은 강대국에 팔아 넘겨서 노략을 당하게 하셨다. 그래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목소리를 거역하고 영적으로 음행하고 불순종하면 그 대가를
톡톡히 치루게 하셨다.
이는 그 언제나 혹독한 고통을
자초하고 저주를 맛보게 된다.
온갖 압박과 재앙과 질병이
찾아와서 괴로움을 더했다. 그제서야 잘못을 깨닫고 살려 달라고 슬피 울며 부르짖고 회개했다. 그나마
천만다행이다.
만일 이스라엘이 생수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 품으로 돌이키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그들은 터진 웅덩이처럼
되어 하나님의 생명과 끊겨졌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멸절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긍휼하신 하나님은 그 언제나
진실과 눈물에 약하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품으로 돌아올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불쌍히 여기사 뜻을 돌이켜 주셨고 구원을 베풀어주셨다. 이런
반복적인 역사경험을 기록한 책이 바로 성경 말씀이다(삿2:10-22).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자. 우리 가정이나 교회에 그 어떤 문제나 어려움이
없으면 좀처럼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기도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사람의 특징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자식이 아프다거나 미래가 막힌다든지 하면 그때서야 견디지 못하고 하나님을 찾는다.
2. 세상에는 사람의 지혜로는 납득하기 힘든 고난도 있다. 나의 죄와는 별로 상관없어 보이는 고난이
그것이다. 선천적인 신체적 장애를 입고 태어난다든지 지진 같은 재해나 전쟁이 터지면 한 순간에 모든 사람들이 죽을 운명의 고통 속에 갇히고
만다. 여기에는 남녀노소의 구분도 없고 내 의지와도 상관이 없다. 모든 인류는 굴비 엮이듯 운명 공동체로 함께 엮여서 끝없는 고통을 함께
받는다. 세상에는 암담한 미래를 운명적으로 체념하며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이런 절망적인 모습을 본다는 것은 곁에서 보는 사람마저
안쓰러움을 준다. 도대체
이런 고난은 왜 있는 것이며 어떤 이유에서 찾아오는가?
하나님이 자비하시다면 왜 이런 설명하기조차 어려운 고통의 문제를 허락하시며, 하필이면 왜 내가
당해야만 하는가? 내가 이런 고통을 받아야만 할 정도로 무엇을 그리 잘못했단 말인가? 아무리
알려 해도 똑 떨어지는 답이 없어 보인다. 인생은
가시밭길, 고해(苦海)와 같다고 하는데, 각가지 신음하고 고통 하는 피조물들의 모습을 보면 연민마저 느끼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의를 행했기 때문에 핍박과 고난을 받는 경우도
있다.
우리 호산나교회에는 시각장애인이 여럿 계신다. 예수님은 이들의 아픔과 고통에 대해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셨다.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9:1-3).
맹인 된 사람의 고난과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나타내고자 하는 일 사이에는 도대체 어떤 관련이 있으며
무슨 뜻이 숨어 있는 것일까?
맹인은 죄 아래 있는 인간 세상이 겪는 고통의 대표적 상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누구보다도 절실하다.
그들은 바로 이 사실을 온 몸으로 증언함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이런 고난을 통해서 역설적으로 우리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품을 떠난 인간과 세상은 헛될 뿐이라는 궁극의 사실을
처절하게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죄와 저주 아래 있는 인간실존을 온 몸으로 명백히 확인시켜주고 그 대신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무슨 뜻인가?
우리는 고난의 문제를 제대로 대처하려면 신앙의 대전제(大前提)가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품을 떠난 세상은 이미 죽을 운명 속에 있다는 사실과 사단 마귀가 활동하는 어두움 가운데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성경은 이를 간단하게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갈3:2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롬3:9) 라고 말씀한다.
그러므로 세상에 대해서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지 않으면 안된다. 세상에 대한 모든
육적인 욕심과 헛된 욕망을 포기하라는 것이다.
내가 풀지 못하는 어려운 고난이 찾아온다할지라도 이상하게 생각지 말고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런 때 일수록 그 어떤 세상적인 집착이나 미련을 싹싹하게
버리고 하나님만 바라보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내게 하나님 한 분만이 남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의 집착을 뿌리부터 끊고 하나님 한분만이 유일한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나의 반석, 나의
구원으로 고백되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내게 궁극적으로 남는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 한 분 뿐이시기 때문이다.
그 어떤 경우에도 절망적인 인류에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요1:29)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고 세상에 오셨다’(히2:15) 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복음이다. 죄와 저주와 고통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혈과 육을
입으시고 사람이 되어 세상 한가운데 오셔서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시고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영생의 소망과 영원한 하늘나라의 기쁨이
되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이 바로 복음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음의 비밀을 깨닫게 하시려고 고난이라는 도구를 적절하게 사용하신다.
“네가 그렇게 잘났냐? 착각하지 말라. 내 품을 떠난 너는 실상 아무것도 아니다(Nothing).
네가 그렇게도 사랑하고 원했던 너의 꿈, 너의 소원조차도 결국은 궁극적으로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아름답고 숭고하다고 믿었던 인간의
사랑과 헌신조차도 결국은 헛되다는 사실, 나를 떠나서 너는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 해 아래 영원하거나 새것은 절대로
없다는 사실, 다 썩고 사라지고야 말 한시적인 것이라는 사실, 하나님만이 영원하시고 하나님만이 내가 믿고 의지할 나의 구원자라는 사실.....”
고난의 끝없는 깊이를 통해서 이와 같은 사실들을 몸서리치도록 실증적으로 확인시켜주시고 하나님께만
최종적으로 항복하도록 만드신다.
영국 출신의 미국 변호사이자 사업가인 스팻포드(H. G. Spafford)는 ‘내 평생에 가는
길’(찬 413장)이라는 곡을 작사 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평안해....’
이 찬송시를 쓴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 상황에서 이런 시를
썼을까?
이 찬송가에 대해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느끼는 감정은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아무런
걱정 없이 흥얼대는 찬송 같다.
그런데 작사자가 어떤 상황에서 이 시를 썼는지 살펴보면 너무나 뜻밖이다. 그는 시카고의 ‘무디’
교회에서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고 부지런히 일도 해서 많은 명성과 재산도 쌓았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유명한 1871년 시카고 대화재로 인해
사업장은 한 순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이런 와중에서도 그는 시카고 시(市)의 복구와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들을 도와주려고 애를 썼던 신실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설상가상으로 그 해에 큰 아이를 성홍열로 잃고 말았다.
이런 역경 때문이었는지 아내의 건강이 악화되어 의사로부터 휴양을 하라는 조언을 받았다.
계절적으로 지금쯤인 1873년 11월에 가족 전체(네 딸과 아내 그리고 스펫포드)는
영국에 다녀올 계획을 잡았다. 당시에는 미국과 영국을 배로 왕래했다. 증기선으로 약 12일 정도 걸린다. 그런데 11월 15일 영국으로 떠나기
직전 스팻포드에게 일이 생겨 아내와 딸들이 먼저 배를 타고 영국으로 향했다. 그 배의 이름은 프랑스 선적 ‘빌 드 아브르’(VILLE DU
HAVRE)였다. 이 배 이름이 이 찬송가의 원 제목이다. 도대체 무슨 사연인가? 항해한지 일주일이 지나서 ‘빌 드 아브르’ 배는 안타깝게도
다른 배와 충돌한 후 침몰하고 말았다. 226명이 익사하고 47명만이 구조된 대형 사고였다. 스펫포드의 가족들이 5명이나 타고
있었는데 실신한 채 겨우 구조된 아내가 친 전보는 단 두 마디였다. “혼자 살았음!”구약성경의 욥과 비슷한
경험이다.
어려운 일을 연거푸 겪은 것이다. 스팻포드는 참담한 심정으로 영국으로 가서 부인을 만난 후 다시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오게 되었다.
항해 중 배의 선장이 찾아와 이런 말을 건냈다.
“스팻포드씨, 지금 우리는 당신의 아이들이 잠들어 있는 바로 그 지점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그 순간
참고 참았던 슬픔과 왠지 모를 분노가 가슴 밑바닥에서 솟구쳐 올랐다. 선실로 돌아온 스팻포드는 그 터지는 가슴을 부여안고 밤새 몸부림쳤다.
“하나님, 어찌 이러실 수 있습니까? 내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이런 시련을 안겨 주시는 것입니까?”원망과 좌절, 분노가 섞인 기도로 밤새
몸부림치는데, 얼마나 되었을까? 아무 일 아니라는 듯 선실의 창문 밖으로 먼동이 터 왔다.
그 순간 빌립보서 4장 6-7절 말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라는 말씀이 그의 영혼에 감동으로 다가왔다. 이 말씀은 설명할 수 없는 평안으로 위로를 주고 천국의 소망을 주었다. 그는 즉시
영감으로 떠오른 이 찬송가의 가사를 메모 했다. 저 푸른 초원 위, 그림 같은 집에서 끄적거린 낙서가 아니다. 고통의 한복판에서 새긴 고백이다.
이 찬송가 가사에서 ‘평안’은 그저 무사 안일한 안락함을 뜻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위로하심을 느낀다” 정도의 의미로 보여진다.
1절의 내용은 이렇다. 어떤 운명 속에 있든지 간에, 주님께서 이렇게 다짐하라고 하시는구나.
“하나님을 섬기는 신자로서 이 상황을 담담히 감내해 내겠다”. 직역을 하면 이런 다짐이다. 괜찮아! 괜찮아!”
2절의 내용은 이렇다. 많은 고난이 닥쳐올 때 이 생각을 부여잡고 내 삶을 추스르겠다. “그리스도께서
속수무책인 나를 돌아보시고 나를 위해 보혈을 흘리신다!”. 이 믿음을 부여잡고 주님께
의지하자.
원 가사의 뉘앙스를 살려서 다시 한 번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1절: 잔잔히 흐르는 강처럼 평온한 인생길을 가고 있을
때든지/
소용돌이치며 덮치는 험한 파도 같은 슬픔을 겪을
때든지/
그 어떤 ‘운명’속에 있든지 간에/ 이렇게 고백하라고 주님은 가르쳐 주셨다/ “신자로서 이 상황을
담담히 감내해 내겠어!”
2절: 사탄이 나를 괴롭히고, 많은 고난들이 닥쳐올 때/
내가 가진 이 복된 확신으로 삶의 중심을 잡겠습니다/
“그리스도는 어찌할 바 모르는 이 상황을
돌아보시고/
나를 위해 주님의 보혈을 흘려
주십니다.
‘고요한 바다로’라는 찬송(찬373)도 있다.
고요한 바다로 저 천국 향할 때/ 주 내게 순풍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풍랑과 큰 물결은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을 뜻하지만 참으로 묘한 것은 그 때문에 천국 항해가 더 빨리
가게 된다는 심오한 뜻이 담겨져 있다.
바람에 의지하여 가는 돛단배는 바람이 없으면 갈 수가 없지 않은가.
이와 같은 찬송가에는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내공(內攻)이 담겨 있다.
이 믿음의 선배들과 마음을 합하고 찬송을 부르면 내 믿음이 그 믿음에 공명(共鳴)되고 그 찬송이
우리의 소중한 기도가 되는 것이다.
비온 후에 땅이 굳는다고 한다. 고난의 십자가를 통해서 사람의 죄를 정화시키고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시고 불멸의 부활과 천국의 승리를 주시니 고난은 더 이상 저주가 아닌 하나님의 신비요 하나님의 비밀이다.
아쉽기는 하지만 이제서야 비로서 죄와 고통스런 육신의 장막을 벗고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온전한 자유를
누리며 주님 얼굴을 뵙고 살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괜찮다 괜찮아! 다 받아 들이고 다 용납하고 끝까지 참을 수 있다....." 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서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기 때문이라’는 시편기자의
고백은 위대한 깨달음이요 새롭게 하나님의 생명과 복을 얻게 하는 신비스런
비밀이다(시119:71).
* 아버지 품속에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가 되어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를 섬기셨다.
그 십자가의 영광이 우리 구원의 기쁨이
되었다(빌2:5-6).
*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지만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은 형벌에 가깝다.
고난도 다 같은 성격이 아니다.
(사53:4 사48:10 마16:21빌1:29 골1:24, 딤후2:3 벧전2:20. 3:14.4:19
히2:9)
* 예수님은 의인으로서
불의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셨다(히2:9
마16:21).
* 대속 제물로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신 예수님은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한다(벧전3:22).
*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으로 고난을 받지 말라.
도리어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고난 받기를 기뻐하고 영광으로
알자(벧전4:15).
◆ 말숨 산문집 제7권 '그대 안해 나의 어여쁜 신부여'가 출간되었습니다. 제게 문자나 메일로
답신(주소명기) 한번 주시면 보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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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한 사람입니다. 어느 교회이든 제게 간증 설교할 기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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