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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 외에 또 다른 하나님의 의(義)
수학에서는 개념원리(槪念原理)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수학을 잘 하고 못 하고는 수(數)가 지니고 있는 공통적이고 일반적인 성질을 체계적인 원리로 얼마만큼 터득하고 이해할 수 있느냐에 달렸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는 일은 너무도 중요하다.
예를 들자면 ‘율법’과 ‘주 예수의 복음’에 대한 개념 이해가 그것이다. 여기에는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특질과 인간은 왜 예수를 하나님의 뜻으로 믿어야 하는지가 서로 맞물려 있다.
‘율법은 천사들을 통하여 모세로 말미암아 온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1:17,갈3:19)는 말씀은 정확한 개념 이해 없이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말씀이다.
말씀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 이해가 되어있지 않으면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믿어왔던 하나님 신앙은 어째서 주 예수를 믿는 신앙이 꼭 필요해야만 했던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알기 어렵다.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는 그리스도 신앙의 출현은 어떻게 그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명확한 개념 이해는 신앙의 터전을 굳건하게 세워줄 것이다.
1. 율법과 복음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온 것이고, 은혜와 진리의 복음은 예수로 말미암아 온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의(義)다.
율법은 모세가 계시 받은 십계명을 골자로 하고 있는데, 율법은 그 언제나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지켜 행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가 정녕 하나님께 생명을 얻어 살기를 원하고, 복 받고 형통하기를 원한다면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과 성품과 목숨까지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만 한다.
사랑의 본질은 율법이다. 율법의 모든 정신은 사랑으로 귀착된다.
율법의 요구는 곧 사랑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사랑이 복음인줄 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다.
사람을 근원적인 죄에서 해방시키는 복음은 사랑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라는 하나님의 또 다른 의(義)다.
율법은 거룩하고 신령하며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요 하나님의 의다.
그런데 율법은 사랑과 축복의 법임과 동시에 죄와 사망의 법이기도 하다(롬8:2). 왜냐하면 율법의 요구에 부합되지 못하면 즉시 책임을 묻게 되고,
심판 받아 저주스런 형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모든 사람은 운명적이고도 생래적(生來的)으로 하나님 품을 떠나 존재하는 까닭에 율법 앞에 무력하기 그지없고, 죄와 저주가운데 죽음을 경험하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율법을 통해서는 죄의 실체가 무엇인지 명백히 깨달아 알게 되고, 인간 존재가 얼마나 절망스러운 존재인지를 뼈저리게 인식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율법을 통해서 세상과 모든 인간은 죄 아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죄에서 구원해줄 그리스도(메시아) 즉 하나님의 은혜가 반드시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비하신 하나님께서는 율법 외에 또 다른 하나님의 의를 준비해 놓고 계셨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다.
히브리 구약성경의 원래 이름은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이다.
율법은 본질적으로 오실 메시야를 바랄 수밖에 없는데, 예언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고, 이것이 성경 말씀이 된 것이다(요5:39).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율법 외에 하나님의 또 다른 의(義)’라고 말씀한다(롬3:20-21).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마귀를 심판하시고 율법의 요구를 완벽하게 성취하셨다.
누구든지 죄를 회개하고 예수 품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은 죄 사함의 은혜를 선물로 주시며, 하나님의 자녀 삼고, 마지막에는 부활 영생 천국까지
전적인 은혜로 주신다(요1:12. 행16:31).
이를 짤막한 한마디로 \'구원\'이라고 한다.
세상에 구원이 필요치 않은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다.
구원은 100%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사람이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어 그 대가나 공로로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다. 오직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품으로 오는 자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은혜로 거저 주시는 선물이 구원이기 때문이다.
복음 곧 복된 기쁜 소식이 구원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통해서 구원의 복된 소식이 계시(啓示)되어 세상에 나타나졌기 때문이다. 믿음은 이러한 하나님의 크신 뜻을 깨달아 알아보고 믿고 받아들이는데서 부터 출발한다.
예수가 태초부터 하나님이 정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經綸)이라는 사실을 성령의 감동으로 믿고 고백 하는 데서부터 믿음은 싹트기 시작하고 자라서 열매 맺는다(엡3:2).
그러므로 율법은 구원하는 법이 아니라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蒙學)선생 역할을 한다(갈3:24).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롬3:20-21)
율법은 모든 사람을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 절대적으로 구원이 필요한 죄인, 하나님이 외면하시면 그야말로 절망 그 자체라고 끊임없이 설득하면서 정죄하는 한편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라는 회개를 촉구한다.
율법은 본의 아니게 죄와 사망의 법이라는 악역을 담당한다.
그러나 검사 역할이 없는 사법부의 정의는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율법없는 은혜는 그 자체가 허구(虛構)의 속임수요 기만이라는 사실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육체의 병도 고치려면 먼저 정확한 신체검사가 필수다.
말하자면 율법은 사람이 죽을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율법을 범하면 실제로 저주받고 죽는 줄 알아야 한다.
선악과의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죄를 짓는 자마다 어둠에 붙잡히고 이런저런 저주와 죽음을 경험한다.
율법은 거룩하고 신령한 하나님의 말씀이요 뜻이지만 율법 그 자체로는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지닌다.
그래서 하나님은 율법 외에 보다 나은 또 다른 하나님의 의를 준비해 두셨다. 그것이 바로 예수라는 또 다른 하나님의 의다.
태초 이전부터 아버지의 품속에 계시던 생명의 말씀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말씀이 육신이 되게 하셔서 때가 차매 이 역사 속에 나타내 보이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신 분이시다(롬10:4).
예수 흘리신 보배로운 피로서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신 것이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위기17:11) 라고 말씀한다.
예수의 흘리신 피는 짐승의 피가 아닌 하나님의 피다.
우리와 맺은 영원한 새 언약의 피요, 율법 외에 하나님의 또 다른 의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예수의 피를 인류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 모든 인류는 하나로 품어지고 한 형제자매가 된다. 예수가 아버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씀은 그런 뜻이다. 예수가 부활이요 영생이라는 말도 바로 그런 뜻이다.
2. 이방인 선교
유대인들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여호와’라는 이름을 섬겼던 위대한 민족이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을 자기 민족의 하나님으로만 알았다.
그러나 편협했던 정신이 깨어나기 시작하면서 천지의 주재되신 하나님은 모든 인류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배타적인 선민의식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모든 백성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전파해서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면서부터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을 모르던 이방인들도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인 예수께로 돌아오니까 죄 사함의 은총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성령 받아 하나님의 일꾼까지 되었다(행10:45. 행15:8).
성령 하나님을 친히 목격하고 체험한 초대교인들은 이방인들에게로 눈을 돌려 목숨 내걸고 예수를 전파했다. 세계 선교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예수 이름이 전파되는 곳마다 지옥이 물러가고 천국으로 변화되는 성령의 역사가 불 같이 일어났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
어두움과 저주와 죽음의 영 마귀가 쫓겨나고 생명과 빛을 주시는 거룩하신 성령님이 오셔서 주님이 되어주셨던 것이다.
이는 천국이 도래할 때까지 현재진행형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이다.
3. 구원은 하나님만이 판단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행4:12). 지금 우리는 하나님 은혜로 예수 이름을 직설적으로 알고 믿고 부른다. 은혜의 때를 살고 있는 셈이다. 감사한 일이다.
그런데 오늘 날 교회에서는 지나치리만큼 하나님의 구원을 천박하게 말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테면 구원을 무슨 주술적인 것인 양 취급하고, 예수를 편협한 교조주의(敎條主義) 창시자 정도로 가두어 놓은 채 기독교 종파주의라는 그릇된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그런 것들이다.
예수는 인류를 구원하러 오셨지 종교전쟁을 하러 오신 분이 아니다.
인간의 궁극성과 연결되어 있는 구원의 문제는 하나님만이 말하실 수 있고
판단하실 수 있는 영역이다. 여기에는 타종교와의 문제를 비롯하여 ‘숨어있는 익명(匿名)의 그리스도인’(한스 큉) 이라는 폭넓은 차원까지도 결부되어 있다. 그런데 경솔하게도 누구는 구원 받았고 누구는 구원 받지 못했다고 함부로 말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인간의 구원 여부는 누가 뭐래도 하나님의 영역이다.
우리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 하나는 그 어느 누구도 인간 자신의 능력만으로는 궁극적인 구원이 절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도를 깨달아 부처가 된다는 주장도 사실 따지고 보면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진정한 의미의 구원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가는 죽음까지도 넘어서는 실체적 부활의 진실 외에는 감히 구원이라 말할 수 없다. 그래서 구원은 하나님만이 말씀하실 수 있다. 죽은 자도 살리시고 없는 것도 있는 것처럼 불러내시는 하나님만이 은혜로 구원을 주실 수 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모두 예수의 피를 은혜로 덧입고 나서야 천국 문턱을 넘어갈 수 있도록 영원 전부터 아버지 하나님께서 뜻하셨다.
그가 살아생전에 예수 이름을 알았던지 몰랐던지 상관없이 그가 만일 하나님 은혜로 구원에 합당히 여김을 받을 수 있다면 그도 역시 예수의 피를 은혜로 덧입을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영원 전에 뜻하신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이다.
예수 복음이 있는 곳에 지옥 권세가 무너진다. 그 대신 참된 자유가 찾아온다. 죽음의 세력도 어쩌지 못하는 자유!
그것은 곧 하늘 평안이고 천국의 안식이며 천국의 구원이다.
율법은 우리를 형통한 복으로 인도 하지만 반면에 끊임없이 속박하고 저주와 죽음을 맛보게도 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이다.
예수는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시려고 오셨다(마5:17). 율법의 한계를 예수 흘리신 은혜의 피로서 온전케 하신 것이다.
우리 불교계에 효봉 이라는 스님이 계셨다. 그는 일본 와세다 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평양 복심법원에서 십년간 판사직을 지내셨다.
어느 날 독립운동을 하다 잡혀온 죄수를 재판하면서 오히려 당당하기 그지없는 죄수에게서 호된 질책을 당했다.
“나는 일제 강점기에 억압받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 바쳐 싸우고 있는데 너는 도대체 무엇 하는 놈이냐? 버러지보다 못한 놈!....”
자신의 사형언도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그를 본 순간 퍼뜩 정신이 들었다. “내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판사직에 회의를 느낀 그는 어느 날 처자식을 다 버리고 갑자기 엿판을 메고 팔도강산을 방랑하기 3년, 1925년 금강산 신계사 석두스님 문하에서 출가하여 불굴의 의지로서 절구통수좌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도를 닦았고 한국 불교계에 불후의 큰 족적을 남겼다.
나는 효봉 스님의 고뇌에 찬 일생을 보면서 너무도 애처로와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처자식까지 버리고 출가를 한단 말인가! 아니 처자식은 또 어쩌란 말인가. 그런다고 무엇이 달라진단 말인가.
백팔번뇌(百八煩惱)를 끊어보려고 모진 세월을 수행했지만 딱히 해답이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이것이 인간이 처한 슬픈 딜레마다.
율법의 한계에 스스로 갇힌 전형적인 모습 아니던가.
거의 모든 종교들이 이런 저급한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예수라는 이름은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이름이다.
율법의 멍에를 메고 고통 하는 인생들에게 하나님은 무한한 은혜, 예수라는 이름을 주셨다. 그래서 복음 곧 기쁜소식이라고 한다.
율법이 죄와 사망의 법(롬8:2)이라고 한다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다고 말씀한다.
율법 외에 또 다른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는 진정한 자유와 구원을 주시는 ‘온전한 율법’, ‘자유의 율법’이라고 야고보 선생은 말씀한다(약1:25, 약2:12).
우리를 얽어매고 정죄하는 저주의 사슬에서 완전히 해방시키고 구원하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다.
예수 그리스도! 그는 우리를 모든 무거운 멍에에서 풀어 자유케 하고 구원까지도 은혜로 주시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이요 하나님의 또 다른 의다.
* 예수님의 복음은 해방의 복음이다.
죄로부터 마귀로부터 온갖 비인간적인 질곡으로부터
궁극적으로는 죽음으로부터의 완벽한 해방이다(눅4:16-19,히2:14).
* 하나님은 세상이 예수 안에서
하나 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말이 다르고 민족과 문화가 달라도
하나님 주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서로 한 가족이 되어
화목하게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요17:11).
* 하나님께서 내 삶에 오시면
슬픈 눈물도 기쁨의 강으로 변하고
화(禍)도 복으로 바꾸어진다(시107:31-42).
* 사람은 동물과는 달리
하나님의 형상을 갖은 특별한 피조물이다.
그 때문에 인간은 서로를 존재로부터 긍정하지 않으면
행복해질 수 없다(롬15:7).
*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 수 있는 존재다.
물, 공기, 햇빛 같은 것들은 절실하게 소중 하지만
값없이 맘껏 사용하고 즐기며 산다.
만일 값을 요구 한다면
그 누구도 생존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고전15:10).
◆ 저는 신앙의 여정 가운데 특별한 의미의 삶과 죽음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어느 교회이든 제게 간증 설교할 기회를
주시면 기꺼이 제 자신을 헌신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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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산나교회 010-9059-4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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