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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만 통해도 평화롭다
옛날 옛적에는 법이라는 것이 없었다. 그저 상식(常識)으로 살았다.
상식으로만 살아도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서로 통하며 살 수 있었고, 크게 불편하거나 모자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문자라는 것이 없었을 터이니 법 규정을 만들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날 세상이 복잡해지고 완악해지면서 법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사회 구석구석에 적용되는 법 규정은 너무도 방대하고 복잡 세밀하여 법 전문가조차 다 알 수 없고 사안에 따라 법전을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가 되었다. 우리가 살면서 법을 따지기 시작하면 할수록 그만큼 질적인 면에서도 저급한 수준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나 마찬가지다.
법보다 우선하는 것이 상식(常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날 세상은 너무도 악하여 상식만으로는 살 수 없고, 심지어는 법의 허점을 교묘하게 악용하는 일까지 서슴없이 자행한다.
가능하면 교회에서는 당회(堂會)를 많이 하지 말라고 한다.
당회는 은혜보다는 법을 더 따지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당회에서는 정해진 법을 따라 회의를 하고 어떤 문제를 결정하기 때문에 분위기가 굳어 있을 수밖에 없고 은혜가 없기 때문에 사안의 본질보다는 형식에 매이는 경향이 있기 때문 아닌가 한다.
당회를 자주 하는 교회 치고 문제없는 교회가 없다는 것이다.
회 중에 가장 맛없는 회가 당회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말하자면 성숙한 좋은 교회가 되려면 가급적이면 상식적인 수준에서 서로가 알아듣고 이해하고 배려하며 자연스럽게 어떤 일들이 결정되어질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광명시에 있는 광산교회의 목회 철학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성도들로부터 인정받는 교회’가 되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상식이 통하는 교회를 만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우리 호산나 교회가 합병을 하면서 나도 한마디 했다.
“우리도 알만큼 아는 사람들이니 상식이 통하는 수준에서 서로 기도하고 의논하며 협조한다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입니다”
상식은 단순하다. 더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명확 자명(自明)하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것을 판단할 때 최우선 순위는 그것이 상식적인 것인가를 먼저 묻지 않으면 안 된다. 상식은 법 이전에 더 우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법을 만들 때 만일 상식적인 것까지 규정하려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사전적인 의미의 상식(common sense)이란 어떤 것일까?
‘전문적인 지식이 아닌 보통의 건전한 이성을 갖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깊은 고찰을 하지 않고서도 극히 자명하며 많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지식’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그러니까 상식적인 것이란 특별한 말이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누구나 다 알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을 뜻한다.
나는 교회 일과 관련하여 상식적으로 일을 처리하여 크게 낭패를 당하고 어려움을 자초한 경우가 몇 번 있다.
일례를 들자면 교회 소유의 우물분쟁이 그 좋은 경우다.
10여 년 전, 호산나 교회를 지을 때 건축 자금이 필요하여 선친께서 물려주신 땅 가운데 일부를 매각하였다. 교회 앞에 음식점을 지은 주인이 30년 전에 우리가 판 우물을 같이 사용하게 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 당시 수도도 개통되지 않았고 우물 파는 비용을 감당하기가 너무 벅차니 물을 함께 쓰게 해 달라는 것이다. 그대신 모터 전기세는 자기네가 부담할 테니 길을 열어 달라는 간곡한 부탁이었다. 교회 전기세라야 월 3,000원 정도에 불과했지만 나는 남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이 좋았고, 또한 교회가 돈이 필요할 때 마침 땅을 사준 것도 감사한 은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함께 쓰자고 쾌히 승낙했다. 그런데 며칠 있다가 또 부탁이 들어왔다.
우물 소유권자가 행정적으로 자기 이름으로 변경되지 않으면 식당 운영 허가 자체가 나지 않으니 자기 명의로 변경해 달라는 것이다.
이는 행정적인 요식행위에 불과한 것이니 길을 열어 주시는 참에 한 번 더 꼭 도와달라는 것이다. 그러면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도 했다.
우리 가정에서는 모두가 반대했다. 거기까지는 안 된다는 것이다.
후일 만에 하나 엉뚱한 얘기하면 우리가 불이익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 같은 의견을 반대했다.
“같은 값이면 인간을 긍정하며 살아야지 왜 부정하느냐. 왜 나쁜 쪽으로만 생각하느냐. 그들이 무슨 까닭으로 은혜 베푼 우리를 해롭게 하겠느냐. 다 사람 사는 세상이고, 다 사람 살자고 하는 일인데, 도와주며 살아야지 무얼 의심하거나 따질 필요가 있는가.
그저 서로서로 사람대접해 주며 믿고 삽시다.....” 하면서 만들어 온 서류에 도장을 찍어 주었다. 불이익 당하지 않도록 법적 효력을 가진 문서를 만들어 도장을 받아 놓으라는 말도 있었지만 그것조차도 마음에 께름직하여 아예 무시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시끄러운 문제가 발생했다.
우리 이름으로 고지되는 납부서는 일단 우리가 책임을 져야만 한다. 그런데 자기들이 우리 보다 몇 곱절은 더 전기를 쓰면서도 제 때 돈을 주지도 않았고, 구걸하러 다녀야만 했다. 뿐만 아니라 장사하는 날은 물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우리 교회가 제대로 물도 쓰지 못하게 간섭하기 시작했다. 너무한다 싶어서 이의를 제기 하니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 우물이 법적으로 누구 것으로 되어 있느냐? 아예 물을 주지 않을까 보다.....” 천부당 만부당 협박하는 말에 너무도 화가 나서 큰소리가 났다.
그랬더니 한걸음 더 나갔다. “이 우물은 내가 돈 주고 샀는데 무슨 소리냐?” 그 순간 정말 사람이 미워졌다. 어느 한 순간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말이 실감이 갔다. 목사가 이렇게 느껴졌다면 그 자체로 내 영혼은 크게 다친 것이다. 주객이 전도(顚倒)되어도 유분수지 생사람 잡는 다는 말이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고 ‘똥 싼 놈이 되레 큰 소리 친다.’는 말도 있는데 정말 피가 거꾸로 솟았다. 돈 문제로 목사가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정말 어쩔 줄을 몰랐다. 이웃끼리 이러면 어쩌나 고민하던 중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말대로 그 사람은 사업이 쫄딱 망해서 매각 처분하고 다른 곳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그 일 후로 지금까지도 수시로 주변사람들에게 면박을 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목사님은 바보도 아니고 왜 그러십니까? 늘 남 사정만 봐주고 손해 보는 일만 하고 사니 말입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벌써 몇 번째입니까? 그러고도 아직도 정신 못 차리는 고집불통이시니 목사님을 믿고 어떻게 살 수 있단 말입니까. 이젠 절대로 이런 일에 나서지 마십시오. 세상물정 모르는 목사님을 더 이상 인정할 수 없으니 불가피하게 이런 일에 있어서만큼은 자격을 박탈합니다. 목사님은 기도로 지혜를 구하시고 하나님 일에만 전념하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까지도 근본적으로는 내가 옳다는 생각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어 고민이다.
“나를 억울하게 한 그 사람이 고쳐야지 어디까지나 선의로 대한 내가 무엇을 고친단 말인가. 항상 법보다 상식이 더 우선하고, 적어도 목사라면 상식정도가 아니라 상식을 뛰어넘어 기대이상으로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좀 더 비범(非凡)한 하나님의 심정으로 초월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이런 일 때문에 욕을 얻어먹고 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하나님께 복을 받고 산다고 믿는다. 하나님이 나를 특별히 살려주신 이유도 그런데 있는 것 아닐까 한다....” 궁색한 변명 같지만 이는 나의 진실한 신앙고백이다.
세상에는 남을 속이고 빼앗고 해를 끼치는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상식까지도 넘어서서 오직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보고 믿음으로 비범하게 행하며 남을 돕고 베풀고 은혜의 삶을 사는 하나님의 사람들도 있다.
‘코카콜라 회장의 유서’는 우리에게 많은 도전을 준다.
학자요, 정치가요, 목사요, 주한 미국대사(1993-1997)였던 <제임스 레이니>는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여 에모리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건강을 위해서 매일 걸어서 출퇴근하던 어느 날 쓸쓸하게 혼자 앉아 있는 한 노인을 만났다. <레이니>교수는 노인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인사를 나누고 말벗이 되어 주었다. 그 후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노인을 찾아가 잔디를 깎아주거나 커피를 함께 마시면서 2년여 동안 교제를 나누었다. 그러던 어느 날 출근길에서 노인을 만나지 못하자 그는 노인의 집을 방문하였고 노인이 전날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곧바로 장례식 장을 찾아 조문하면서 노인이 바로 <코카콜라 회장>을 지낸 분임을 알고는 깜짝 놀랐다. 그때 한 사람이 다가와 “회장님께서 당신에게 남긴 유서가 있습니다.” 라며 봉투를 건넸다.
유서의 내용을 보고 그는 너무나 놀랐다.
“당신은 2년여 동안 내 집 앞을 지나면서 나의 <말벗>이 되어 주고, 우리 집 뜰의 잔디도 함께 깎아 주고, 커피도 나누어 마셨던 나의 친구 <레이니>에게……고마웠어요. 나는 당신에게 25억 달러와 코카콜라 주식 5%를 유산으로 남깁니다.”
너무 뜻밖의 유산을 받은 <레이니>교수는 3가지 점에서 놀랐다.
첫째는 전 세계적인 부자가 그렇게 검소하게 살았다는 것이고, 둘째는 자신이 <코카콜라> 회장이었음에도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는 것, 셋째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사람에게 잠시 친절을 베풀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큰돈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레이니 교수는 받은 유산 전액을 에모리 대학 발전기금으로 내놓았다. <제임스 레이니>가 노인에게 베푼 따뜻한 마음으로 엄청난 부가 굴러 들어왔지만, 그는 그 부(富)에 도취되어 정신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그 부(富)를 학생과 학교를 위한 발전기금으로 내놓았을 때,
그에게는 <에모리 대학의 총장>이라는 명예가 주어졌다.
사실 이와 같은 감동적인 삶은 일반 상식도 초월하는 비범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흔치 않은 살아있는 얘기다.
자기 죽기 전에 사회적 공익을 위하여 보다 유용하고 가치 있게 물질을 쓸 수 있는 사람의 사람됨을 알아보았던 코카콜라 회장도 훌륭하지만 회장의 뜻을 정직하게 받들어 끝까지 신의를 지킨 레이니 교수 또한 그 못지않은 아름다운 인물이다. 아무리 세상이 어둡고 더러울지라도 이런 하나님의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나는 세상과 인간 긍정에 궁극적인 찬성의 표를 던지고 싶다.
오늘날 교회가 싸우고 다투고 분쟁하고 재판하는 일이 너무나 많다.
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식조차도 지킬 줄 모르는 이기적인 욕심과 탐욕스런 우상숭배가 그 뿌리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사람을 위해서 법이 있는데 법 정신은 온 데 간 데 없고 법 형식을 빌미로 사람을 억압하고 괴롭힌다. 더욱 가증스러운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남의 권리를 짓밟고 수탈하는 희얀한 일도 서슴치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조차 깨닫지 못한다.
맹목적인 교리나 자기 잘났다는 식의 편협한 외골수 신앙에 사로잡히기라도 하면 눈이 멀기 때문이다. 예수를 대적했던 우매한 종교지도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예수께서는 자기를 의롭다고 여기고 있던 그들을 향해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 소경 된 인도자들 이라고 질타하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23:13-15) 그들은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한 외식하는 위선자들이다. 이들은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한 회칠한 무덤 같은 자들이다. 그럴듯한 말로 사람을 홀리지만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여 지옥 판결을 피할 수 없는 멸망의 자식들이다(마23:25-28).
세상에는 너무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이 많아서 항상 문제다.
상식만 통해도 평화로운 세상이 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 방식과는 전혀 다른 나라다.
천국은 섬기는 자가 높아지는 나라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는 사랑의 아들의 나라다(마23:11-12, 골1:13).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세상의 빛으로 부르셨다.
우리는 법보다 상식으로 사는 방법을 배우고,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보다 적극적인 선이라 할 수 있는 비범한 십자가의 희생정신으로 살기를 소원하고 기도하자. 그것은 배웠다고, 실력이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먼저 따뜻한 마음을 품지 않으면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 하나님의 권능이 기꺼이 우리의 삶에
펼쳐지는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걱정하거나 희망을 잃을 필요가 없다.
성령께서 모든 상황 속에서 승리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우리를 충만케 하신다(롬12:12. 롬15:13).
*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성령의 임재를 위해 많이 기도하도록
자극하고 권면하는 가르침과
격려와 본보기로 가득 차 있다(빌4:2).
* 예수님은 평강의 왕이시기 때문에,
그 분 없이는 평강이 있을 수 없다.
믿지 않는 사람의 마음에는 평강이 없다.
잠깐의 행복과 만족은 느낄지 모르지만
영원히 지속되는 평강은 없다(살후3:16. 롬3:17. 사57:21).
* 그리스도인은 천국의 이슬을 머금고
바람에 흔들리기도 하고 뿌리에서 떨어지기도 하고
함께 영양분을 공급받으며 동시에 서로에게 영양분을 주는
정원의 꽃들과 같다(고전12:4-27).
* 자신을 도우시는 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임을 기억하는 사람이
절망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시50:1, 창28:3).
◆ 말숨 문서선교회(malsum-sdm.com)에 오시면 많은 말숨 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웃에도 많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저는 신앙의 여정 가운데 특별한 의미의 삶과 죽음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어느 교회이든 제게 간증 설교할 기회를
주시면 기꺼이 제 자신을 헌신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말숨\' 산문집 1권을 구매해 주시면 1권이 사랑의 선물로
전국 교도소, 군, 경찰, 학원, 병원에 님의 이름으로 기증됩니다.
(각권 13,000-15,000원. 전6권. 농협:301037-51-098385.
호산나교회 010-9059-4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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