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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현상계(現象界)
웅장하게 잘 만들어진 건축물이나 정교하고 아름다운 어떤 예술작품을 보면 이것을 설계하고 만든 사람을 꼭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 제작자는 뭔가 특별할 것이라는 기대감은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하나님께서 세상 천지 만물을 지으실 때 천사들을 사역자(使役者)로 쓰셨다.
일반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천사들의 수고로 말미암아 신기하기만 한 이 모든 물질계가 지어진 것이다. 천사들의 활동! 그것은 동화 속의 그 어떤 상상이 아니라 실질적인 하나님의 현상계(現象界)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천사들의 세계는 무한한 호기심과 탐구하는 열정을 가지고 사모하고 또 사모할 만한 가치가 있다.
하늘의 신령한 영이신 성령님은 우리들에게 은사(恩賜)들을 주신다.
우리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은혜의 선물로 주신다.
하늘 은사는 믿음 생활에 말할 수 없는 유익을 준다.(고전12:7-11)
우리가 은사를 사모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의 지혜로운 것보다 훨씬 뛰어나기 때문이다. 이는 도무지 비교될 수 없는 것이다.
한치 앞도 모르는 우리를 하나님이 친히 인도하시고, 도움을 주신다면 어떤 장애물이나 가로막힌 장벽도 뚫고 나가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지 않겠는가.
사도 바울은 주의 환상과 여러 계시(啓示)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어떤 사람의 영적 체험을 소개하고 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고전12:2-4)
이 세상 물질 현상계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체계 속에서 존재한다.
논증할 수 있어야만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런데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인 것처럼 보여 지는 하늘의 영들의 세계는 필요하다면 우리 역사 한가운데로 직접 들어오기도 한다.
정확히 말하면 영들의 세계는 비과학적인 것이 아니라 초(超) 과학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계획이나 뜻이 계실 때는 언제 어디서나 천사들의 활동 속에서 신령한 은사들의 영역이 열린다.
이는 인간의 수준으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신령한 천사들의 세계다.
영들의 세계에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기도 하고, 돌멩이가 떡이 될 수도 있고, 물이 포도주로 변할 수도 있다.
우리는 물질세계의 고정관념(固定觀念)을 버려야 한다.
엘리야는 아합과 이세벨이 죽이려 하자 도망을 쳤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인간의 한계에 부딪혀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다.
그 때에 천사가 나타나 생의 용기를 불어 넣는 장면이 성경에 나온다.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왕상19:4-8)
사도 바울은 ‘너는 이방의 빛으로 세움을 입고, 이방인에게 주 예수의 천국 복음을 전파하리라’(행9:15-16)는 특별한 사명을 받고 기도하던 중 ‘비두니아’로 가기를 작정했다. 그 때에 하나님은 ‘마게도냐’지역으로 해서 로마를 복음으로 정복하는 깊은 계획을 갖고 계셨기 때문에 바울의 인간적인 계획을 수정할 필요를 느끼셨다. 그래서 하나님이 환상을 통해서 성령의 깨달음을 주시는 장면이 사도행전에 자세히 나온다.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행16:7-12)
성령님의 특별한 개입과 가르침은 세계 역사의 주도권이 바뀌도록 했다. 하나님이 특별한 병을 치유하실 때, 병을 고치는 천사를 사용하신다.(눅9:1) 마8장-9장, 행19:12절은 그 좋은 경우다.
사람 힘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전쟁에서 필승의 계책을 알려 주는 것은 능력의 천사들이다.(삼상7:3-14),
천사들은 때때로 부활 생명의 역사도 일으킨다.
비통한 죽음 앞에 인간의 가능성이 이미 끝난 상황에서 죽은 자를 다시 살려내는 것이다.(요11:44)
하나님 말씀은 이런 하나님의 은혜의 행동들을 증언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상 책들과는 근본이 다른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이적(異蹟), 기사(奇事)들은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도 은혜 받은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운 구원의 말씀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친히 하나님 입에서 내신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아래에 소개하는 염 학섭 목사님의 신앙 체험과 로뎀나무 아래서의 엘리야의 신앙체험은 매우 유사한 그 어떤 것이 있다.
(애은 염 학섭 목사님은 1897.2.1-1970. 9.13. 그는 일평생을 충성, 희생, 겸허, 청빈 이라는 신앙생활의 4대 비결을 좌우명으로 삼고 생명 바쳐 목양하신 영적 거장이셨다. 다음은 그가 남긴 ‘은총의 회고’에서 발췌한 것이다)
그 당시 청년이었던 염 학섭은 독립운동 중 두 번째로 일경에게 체포되어 함경남도 풍산경찰서에서 취조를 당했다. 혹독한 고문으로 심히 지쳐 있는 그에게 문득 ‘백발노인’한 분이 다가왔다. 손에는 세 겹으로 접은 흰 수건을 들고 있었다.
“두려워 말고 눈물을 씻으라”고 백발노인이 부드럽게 말하며 건네주는 수건을 받아 눈물을 닦고 나니 수건과 노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 신비한 일이 있고 나서 그는 곧 석방되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뜻밖의 일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고문하던 일경들이 갑자기 부드러운 말로 위로까지 하는 것이었다. 천사의 인도로 옥중에서 구출되었던 베드로의 기사(행12:7-17)를 생각하며 그는 하나님께 한없는 감사를 드렸다....
그러나 나라를 빼앗긴 설움, 날로 더해 가는 일본인들의 횡포, 세 번씩이나 동지들에게 당한 배신으로 그는 세상이 싫었다. 파발 주재소를 나와 푸른 하늘을 쳐다보면서 그는 결심했다. 그 길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30여 리 떨어진 풍산군 안산면에 있는 칠행산 한 동굴에 몸을 숨겼다. 무상(無常)한 세상을 멀리하고 심산유곡(深山幽谷) 우거진 숲을 바라보며 금식기도 하다가 죽으면 천국에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9일째 되는 날 새벽 미명(未明)이었다.
굴 밖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빨리 나오너라. 지금은 세상을 비관하고 생을 단념할 때가 아니다. 빨리 나오너라!” 풍산 경찰서에서 고통 중에 있는 자기에게 찾아와 수건을 준 일이 있었던 백발노인이 큰 낫을 들고 굴 밖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는 옷깃을 여미고 밖으로 나갔다. 그 노인은 눈앞에 펼쳐진 넓은 들을 바라보게 했다.
입산한 지 여러 날이 지났지만 그때까지 보지 못하던 넓은 들이 눈앞에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들은 모두 무르익은 곡식으로 출렁거렸다. 추수의 손길을 기다리는 거대한 농장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그에게 백발노인이 낫을 쥐어 주면서 말했다.
“지금은 세상을 비관하고 등질 때가 아니다. 저 익은 곡식들을 거둘 의무가 네게 있다. 가라. 이 낫으로 저 곡식들을 베어라. 하나님께서 이 일로 나를 보내셨다.”
거역할 수 없는 엄숙한 명령이었다. 그는 받아 쥔 낫으로 들에 익은 곡식을 베기 시작했다. 훌륭한 낫이었지만 곡식은 잘 베어지지 않았다.
지켜보던 노인이 그의 뒤로 다가서서 낫을 쥔 그의 손을 잡고 손을 같이 놀려 주었다. 그러자 곡식이 아주 쉽게 베어졌다. 노인과 그는 함께 즐거워했다.
그 순간 그는 정신을 차렸다. 노인도 들도 곡식도 보이지 않았다. 세상을 버린 그에게 하나님께서 한 가지 해야 할 의무를 보여 주신 것이었다. 그를 부르신 것이다. 그는 그 길로 죽으려던 생각을 접고 산을 내려왔다.
집에서는 수척한 몸으로 돌아온 그를 보고 깜짝 놀라며 반겨 주었다.
산에서 내려와 처음 맞는 주일 아침에 집에서 20여 리 떨어진 안산면 파발교회의 낮 예배에 참석했다. 마침 그날 예배 후에는 공석 중인 풍산군의 순회 전도사를 선출하기 위하여 함흥에서 캐나다 선교사 염 재형 목사와 김 재황 목사 두 분이 와서 군내 각 교회 대표들과 자리를 같이 하여 순회 전도사를 선출하기 위한 토의와 투표가 있었다. 흑판에는 전도사 후보 여덟 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뜻밖에도
그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 그는 무척 놀랐다.
그 당시 그는 일경의 요시찰 인물이었고 신앙생활의 경력도 짧았기 때문이다.
그는 일어나서 “나는 자격이 없음으로 내 이름을 후보명단에서 빼주십시오”라고 간청했지만 들어 주지 않았다. 표결 결과 절대 다수로 당선된 사람은 그였다.
그는 다시 강경하게 사양했으나 3.1 운동 중 2년간 복역한 적이 있는 김 재황 목사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만류하고 이 일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라는 권고에 결국 순회 전도사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는 전날 죽기로 결심하고 금식 기도하던 산중의 굴에서 백발 노인이 주던 낫이 생각났다. 밭은 세상이었고 곡식은 불신 동포들이었으며 낫은 복음이었다. 그의 무덤이 될 뻔 했던 동굴이 일평생 몸 바쳐 주의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가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던 성직자의 길을 걷게 된 것은 그와 같은 특별한 부르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우리도 이와 같은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다면 어떤 형편에서 무엇을 하든지 희망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세계는 정말 아름답고 흠모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나는 믿는 것이 있다. 내가 백 시간을 노력하는 것보다 성령님의 단 1초의 기름 부으심이 더 위대하고 효율적인 결과를 가져온다고 믿는 것이 그것이다.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받는 삶이야말로 그 자체로 100 % 완결이고 최상최고의 결과를 가져올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악을
용서하시고 받으실 때
우리는 하나님께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찬송과 영광이 될 것이다. (겔20:40-44시96:8)
* 신앙고백의 첫 번째는
내가 하나님께 모든 죄를 용서받고
용납되었다는 것이다.
구원의 경험은 용서를 체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요8:10-11마9:6 눅24:27 사55:7 롬4:7 히9:22)
* 내가 주님께 원죄를 용서받고 받아들여졌으니
나 또한 남을 용서하며 살아야 한다.
하루 백번이라도 회개하면 받아들여야 한다.
(마6:12 요20:23 마18:21)
* 남의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곧 나의 영광이 된다는 것은
놀라운 주님의 영적인 약속이다.(잠19:11)
* 하나님처럼 마음을 넓히지 않고는
남의 허물을 용서할 수 없다.
사랑에 빚진 심정은
너그러운 아량으로 용납할 수 있게 한다.
(왕상4:29 고후6:12마6:12마18:24롬8:1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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